보는 사람 따라 천 개의 풍경 되는, 그런 그림이 좋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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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만큼이나 깔끔한 경기도 파주 헤이리 작업실의 김태호(59) 서울여대 교수. 우리 나이로 환갑을 맞은 그가 내놓은 ‘완성작’은 안 그린 듯 그린 그림, 수많은 풍경을 숨기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그림, 완성된 건가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3일 오후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김태호(59) 서울여대 교수 작업실 벽엔 연한 하늘색, 혹은 연녹색으로 채색된 크고 작은 캔버스가 잔뜩 걸려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주위 사람들도 ‘언제 그릴 거냐’고 묻죠.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강화도의 절에 갔다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라는 경전의 한 구절을 봤어요. 눈이 와서, 혹은 어둠에 가려져 아름다운 이치와 다를 바 없죠. 별다를 게 없는데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그런 게 위로이고 위안이겠죠.”

 김태호는 철학·종교, 그리고 개인적 경험을 섞어 색과 형태가 극도로 절제된 작품을 선보여 왔다. 검은 실루엣의 새 한 마리, 혹은 쉬어 가라듯 듯한 의자 등을 그렸다. “예전 그림들은 제가 지겨워져서 지운 게 많아요. 그려놓곤 앞에 뭔가 가린 듯해 덮어버리기도 했어요. 이 작업 하고 난 뒤론 지운 게 없어요. 이 그림은 앞에 뭐가 있든 다 받아들이더군요. 보는 사람에 따라 천 개의 풍경이 되어도 좋고요.”

 ‘안 그린 듯 그리기’도 실은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캔버스에 흰색을 깔고 그 위에 검은색을, 그 다음 은색을 덮었다. 그제서야 필요한 색을 올렸다. 간섭효과를 내는 특수한 아크릴 물감의 하늘색, 혹은 연녹색 계통의 단색으로 나무도 그렸다가 바람도 그렸다가 마음도 그렸다. 그래서 이것은 ‘수많은 풍경’이다. 붓이 지나갈 뿐 보이진 않는다. 빛의 간섭효과로 보는 위치에 따라 톤이 조금씩 달라진다. 겹겹이 칠했기에 그림은 꽤 무겁다. 1갤런(3.8ℓ) 들이 물감이 한 통 반 정도 들어갔다.

 -어차피 안 보일 건데 뭘 그렇게 그리셨나요.

 “그래도, 그게 계속 겹치면, 안 보이지만 그 너머에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광경이 전도될 거라 믿는 거죠.”

 그래서 이번 작품은 그간의 시도를 아우르는 완성작이다.

 -마침 환갑이시네요.

 “앞으로 남은 기간도 이런 작업으로 계속 갈 겁니다. 50대를 지나왔지만 살면서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뭐가 진실이고 아닌지, 뭐가 맞고 틀린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연 적이 있죠.

 “모호함을 그린 그림들을 전시했었죠. 불어로 5∼6시 사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을 그렇게 불러요. 결국은 50대에서 60대 사이,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시간, 그런 삶의 모호함을 이르는 말이죠.”

 그의 할아버지는 농부였다. 아버지는 교사였다. 서울 효자동서 태어났지만 장남인 그는 5∼6세 때 강원도 원주의 조부댁에 보내졌다. 이상의 수필 ‘권태’에 나올 것 같은 ‘개도 짓지 않는 마을’이었다. 하염없이 녹색만 펼쳐졌다. ‘부모님은 왜 나를 여기다 이렇게…….’ 툇마루에 누우면 하늘밖에 안 보이고, 눈물만 났다. “제 감수성은 그때 다 생긴 듯해요. 그때 본 안개, 물, 비 온 것, 들새들 날아다니는 것, 그런 장면들과 정서들이요.”

 유년 시절 미술대회에 나가면 꼭 상을 받아왔다. 약속처럼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늘 그림이 잘 풀린 건 아니었다. 제대 후 예전에 그린 것을 몽땅 불태워버렸다. 마장동에서 소뼈를 사다가 학교 마당에 묻은 뒤 2년 후 파내 그려보기도 했다. 시행착오 끝에 여기까지 왔다.

 김태호에게 그림이란 뭘까. “농사 같은 것. 농부가 육신의 양식을 주듯, 예술 하는 이들은 마음의 양식을 만들어야죠. 보는 분들께서 그림 앞에서 망연자실, 넋을 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입 벌리고 눈에 힘 빼고, 아주 편안하게요.”

▶김태호 개인전 ‘스케이프 드로잉(scape drawing)’=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전관(6월 3일까지)과 학고재갤러리 본관(6월 10일까지)에서 동시에 열린다. 02-72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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