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사재기에 추락하는 원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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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가치가 갈수록 국내보다는 외국시장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지난주 후반 달러당 1천1백80원대에서 소강상태이던 원화가치가 다시 폭락하기 시작한 것은 대만 통화가치의 급락과 역외시장(NDF.용어 한마디)에서 외국인들의 달러 매수세 확대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실제로 대만 통화가치가 지난달 29일 장중에 미 달러화 대비 32.97대만달러로 폭락하자 외국인들은 NDF 시장에서 달러를 마구 사들여 밤사이 뉴욕시장에서의 미 달러화 대비 원화가치 종가(終價)가 1천2백6. 0원으로 대폭 떨어졌다.

이에 따라 3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국내 금융기관 및 개인들도 덩달아 달러 사자에 나서면서 원화가치가 급락했다.

최근 하루 중 원화시세 움직임은 전날 뉴욕 NDF 시장에서의 종가가 서울 외환시장에서의 시가로 그대로 이어진 뒤 장중엔 대만달러의 오르내림에 큰 영향을 받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최근 원화가치 급락세의 기본적 배경은 구조조정 지연과 노동계 파업, 반도체값 하락 등으로 대변되는 국내 경제의 불안요인들이다.

외국인들이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달러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나, NDF 시장에서 달러 매수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도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것.

이재욱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그동안은 외국인들이 NDF 시장에서 실수요가 있을 때나 거래를 했지만 요즘은 한국 경제와 향후 원화가치가 더 떨어질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앞으로 환율의 급격한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헤지)하기 위한 가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외국인들의 불안감이 국내 증시에서의 자금 이탈로 이어지고, 자금이탈이 다시 원화가치 하락을 부채질하는 사태를 특히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주초 원화가치가 1천1백50원대를 넘어서 급락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순매수를 유지했으나 지난달 29일 하루 동안은 약 7백억원, 30일엔 오후 3시 현재 1천억원 이상의 자금이 빠져나간 상태다.

차백인 한국금융연구원 국제금융팀장은 "국내 증시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투자자금 약 5백억달러 중 1백억~1백50억달러 가량은 단기간에 언제라도 팔아치우고 나갈 수 있는 성격의 자금" 이라면서 "향후 원화가치의 변동에는 외국인의 자금이탈 규모가 가장 큰 변수이기 때문에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 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투기세력이 원화를 집중 공격해 원화가치를 큰 폭으로 흔드는 환투기 현상은 아직까지는 본격화하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NDF 시장에서의 거래규모도 아직은 평상시 수준인 일평균 5억~6억달러 정도며, 서울 외환시장에서의 거래규모는 원화가치가 급등했던 지난주 초 이후 오히려 이전보다 크게 줄어든 상태이기 때문.

시중은행 외환딜러들은 "앞으로 원화가치가 더 하락할 것에 대비해 기업들이 수출대전으로 받은 달러조차 내놓지 않다보니 거래는 별로 이뤄지지 않은 채 매수 호가만 높게 형성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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