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20년 전부터 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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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부터 꼬였다= "1990년대 초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공사대금 10억달러를 물린 게 그후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90년대 중반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L씨의 말이다. 당시론 엄청난 금액이어서 회사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였으나 위기를 모면한 것은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궤는' 임시변통 덕분이었다. 이 부문의 대손충당금은 아직도 회계장부에 주름살을 만들고 있다.

고위 임원 출신인 L씨는 "물량 위주, 실적 채우기 식의 무리한 해외건설 확장이 경영난의 단초가 됐다" 고 지적했다.

국제적으로 수주 경쟁이 치열했던 80년대 중반 적자 공사를 감수하면서 과감하게 철수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인도 등이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한국 업체의 주요 시장을 공략해 수주 단가가 나빠졌고, 미국 벡텔 등이 장악한 고부가가치 분야는 기술력 부족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샌드위치 상황' 이었다.

◇ 덩치 경쟁을 벗어나지 못했다〓한번 늘어난 조직과 인력을 유지하자니 밑져도 공사를 계속 따내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현대는 90년대 들어 관급공사를 매년 2조원 이상 수주했다.

그러나 98년 8월 이후 건설업계의 담합 구조가 깨지고 공사 물량도 줄어 지난해에는 7천8백억원에 그쳤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이상호 박사는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80년대 후반부터 현대는 선진 건설사처럼 종합관리 회사로 변신했어야 옳았다" 며 "건설 환경은 자꾸 변하는데 좁은 나라에서 만년 1등 자리에만 안주했다" 고 진단했다.

공사를 따내면 시공.설계.관리 등 전문 분야별로 분사 또는 외부업체 용역 등으로 해결하는 선진국형 건설관리(CM)회사로 진작 바뀌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 아파트에 너무 집착했다=현대가 아파트 등 민간 수주 공사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부터다.

92년 당시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총재인 국민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한 직후 관급공사 수주가 어려워지고 해외공사에 필요한 금융기관의 보증도 제대로 안됐다.

이에 비해 주택시장은 신도시 2백만가구 건설 붐으로 호황이었다.

현대 관계자는 "이때부터 토목공사 비중을 줄이고 아파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고 말했다.

실제로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회사의 공공공사 비중은 40%를 웃돌았으나 92년에 23%, 93년에는 20%로 미끄러졌다.

98년 관급공사의 담합 구조가 깨지면서 아예 아파트 공사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현대가 지난해 아파트를 분양해 번 돈은 3천6백98억원으로 98년보다 1천2백30억원이 증가했다.

그러나 아파트 공사는 대부분 선(先)투자 사업으로 분양이 제때 안되면 막대한 자금이 물리게 된다. 이처럼 아파트 사업에 묶인 돈이 현재 1조4천억원에 이른다.

◇ 정도 벗어난 경영에 모기업으로 불이익 당했다〓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떨어진 뒤 그에게 붙은 YS정권의 '괘씸 죄' 가 현대건설에 적잖은 어려움을 주었다고 임직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각종 관급공사 입찰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이고 해외공사의 경우 은행들이 보증을 잘 서주지 않아 93년에 성사단계에 있던 3건, 2억달러 어치의 수주가 수포로 돌아갔다.

이내흔 전 사장이 92년 총선에 출마한 점도 경영에 부담을 주었다.

그룹 차원에서 추진한 대북사업은 이익은 커녕 계속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현대아산 사장을 겸임했고, 금강산 개발사업에 쏟아부은 돈은 6천억원으로 추산된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현재까지 2천4백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다.

모기업이자 지주회사란 점 때문에 계열사 유상증자에 빠짐없이 참여한 것이 결국 부실을 떠안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건설이 보유한 관계사 주식은 대부분 발행가를 밑돌아 최근 유동성 위기 이후 처분한 주식 손실만 2천억여원에 이른다.

◇ 리더십.신뢰성에 금이 갔다〓이런 가운데 올 3월부터 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빚어진 2세 회장간 갈등은 회사 부실을 부채질했다.

회사 직원들조차 "김윤규 사장과 김재수 부사장이 갈등의 한 가운데 있어 경영을 등한시했다" 고 지적했다.

향영21C리스크컨설팅 이정조 사장은 "현대건설이 밝힌 재무제표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영업력은 여전히 괜찮아 보이지만, 부채의 만기 연장을 안 해주는데 버틸 기업이 국내에 몇 곳이나 되겠냐" 면서 "경영권 다툼과 회사의 실상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채권단의 신용을 잃은 것이 화를 자초했다" 고 지적했다.

지난해와 올 상반기 큰 폭의 적자는 이라크 미수금에 대한 대손충당금 부문이 많다.

◇ 외환위기 맞고도 구조조정 게을리했다〓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삼성물산은 임직원을 1천20명, LG건설은 3백60명 줄였다.

너나 할 것없이 야단인데 현대건설은 구조조정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이미 커질대로 커진 덩치를 유지하느라 인원.조직을 쉽사리 줄일 수 없는 체질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주택경기 침체가 결정타가 됐다. 매출 비중이 커진 아파트사업의 분양이 잘 안되면서 그동안 곪았던 상처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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