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학] 강원도 농부시인 유승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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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다 털어버려도 또 다시 남은 삶은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다른 길은 시작된다.

흰구름도 밑에서 쉬어가는 비행기재.수라리재 너머 강원도 영월. 산의 자궁 같이 편안한 단종의 장릉 아래 영월읍내를 지나 다시 산길로 이어지며 길이 끝나는 무렵의 산 중턱에 시인 유승도(40.사진) 씨는 살고 있다.

"봐라, 저 달 표면을 기어가는 가재가 보이잖니?/빛이 맑으니 구름도 슬슬 비켜가잖니/가볍게 가볍게 떠오르잖니/저기 어디 탐욕이 서려 있고, 피가 흐르고 있니?/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산천을 끌어안잖니"

시도 잘 쓰고 몸도 튼실해 좋은 밥벌이 할 수 있고 아내도 도시에서 괜찮은 직장을 갖고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왜 식솔 다 데리고 이런 산중의 산속에 숨어 사느냐고 물었다.

괜한 질문인 줄 알았지만 역시 유씨는 영 딴 대답이다.

이제 벌통도 몇개 되어 꿀을 몇 되 땄다느니, 산중에 채마밭을 일궜는데 기름져 무.배추가 여간 잘 자라는 게 아니라는 등. 해서 대답으로 그가 지난해 펴낸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에서 위 시 '산마을엔 보름달이 뜨잖니' 를 인용할 수밖에.

대학 국문과 졸업 후 유씨는 건설현장 막일꾼으로, 농가의 머슴으로, 옥돔잡이 연안어선의 선원으로, 그리고 탄광의 채탄부로 떠돌았다. 탐욕도 없고 싸움도 없이 자신의 노동만으로 직접 밥이 되는 순수 노동현장만을 떠돈 것이다.

그러다 강원도 정선 구절리 폐광촌에 머물면서 시를 써 199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그 후 결혼도 하고 안양에서 신접 살림도 꾸렸으나 이내 다시 영월로 와 농부 시인이 됐다.

살림을 트럭에 싣고 산굽이 물굽이 돌아 이곳에 들어올 때 아내는 이내 울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친정집도, 친구들도, 세상과도 영영 인연이 끊기는양 펑펑 울더라는 것이다.

막상 산 속에 들어와 보니 정말 농부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고 또 새며 다람쥐 등 산중 식구들과 좋은 관계 맺기에서부터 가축 기르고 농사 짓는 기술 배우기가 녹록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이제 가을걷이를 해 채소며 깨며 꿀 등을 도회 친지들에게 보낼 정도로 어엿한 농부 부부가 됐다.

무엇보다 그런 산중 농부의 삶에서 나온 유씨의 시들이 청정하다. 맑고 청명한 바람처럼 우리 삶의 고단함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비가 그친 어느날, 계절이 바뀌었다 갈대꽃도 바람에 날리고 산도 가볍다/부풀고 펴져서 피어오르고 싶은 것들은 몸을 일으켜 하늘을 높이고, 자리에 들어 깊은 숨을 쉬고 싶은 것들은 땅을 향하여 고개 숙인다/이제 그만 단절하자 성장의 시기도 지났다 망설이는 사람아 보아라 결실의 벌판 아득히 가야 할 길이 있다. " ( '어느날, 가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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