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보부상 길 보고 흥분 …『객주』완결편 나오겠다 싶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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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주영이 조선 후기 보부상들이 다니던 경북 울진의 옛 길 위에 섰다. 30년 만에 마무리될 『객주』 10권을 집필 중인 그다. 치밀한 현장 조사로 유명한 그는 울진에서 봉화에 이르는 보부상 길을 직접 답사하며 소설을 구상했다. [울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객주』는 객(客)이 주(主)인 소설이다. 길바닥을 떠도는 보부상(褓負商)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역사소설이다. 한국문학으로선 벼락같은 소설임에 틀림없다. 『객주』 이전의 한국 역사소설은 대개 영웅담이었다. 권력자나 전쟁영웅, 왕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객주』는 그런 영웅 중심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근력과 근성”이라는 작가 김주영(73)의 확고한 사관에 기초했다. 30년 전 발표된 이 대하소설이 지금껏 널리 읽히는 건 “약자 편에 선” 작가의 소신 덕분인지도 모른다.

 김주영은 1979년 6월 서울신문에 『객주』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84년 2월까지 4년 9개월간 썼다. 81년부터 창작과비평사에서 단행본이 묶여져 84년 완간됐다(총 9권). 그렇게 우리 시대의 고전이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김주영이 『객주』 10권을 집필 중이다. 그는 “『객주』를 다시 쓸 거란 생각을 못 했는데 ‘그곳’을 발견하고선 뜨거운 열망이 치솟았다”고 했다. 30년간 멈춰있던 『객주』를 다시 움직이게 한 ‘그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경북 울진군에 남아있는 옛 보부상 길이다. 작가는 3년 전쯤 그곳을 알게 됐다고 한다. 울진의 흥부장에서 봉화의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보부상 길이 예전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작가는 흥분했다.

 “『객주』를 쓸 당시 주로 취재했던 곳은 시골 장터에요. 장터에서 옛 보부상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보부상 길이 남아있다는 건 그때 알지 못했어요. 이 길을 왜 이제서야 발견하게 됐는지…. 가슴 속에서 불 같은 게 올라왔어요. 30년 만에 비로소 『객주』의 진정한 완결편이 완성되겠구나 싶었죠.”

 16일 오후 『객주』를 다시 움직이게 한 그곳, 울진 옛 보부상 길을 작가와 함께 걸었다. 울진군 북면 두천 1리. 조선 후기 보부상들이 울진의 온갖 해산물을 등에 지고 산을 넘어가던 출발점. 작가는 천봉삼·조성준·선돌이 등 『객주』의 주요 인물들이 떠오르는 듯 말을 천천히 이었다.

 “울진의 해산물을 경북 내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이곳입니다. 보부상이 아니었으면 울진의 해산물과 봉화의 농산물이 거래될 수 없었죠. 보부상은 짐을 진 채 울진에서 봉화까지 150리(약 58㎞) 길을 3박4일간 걸어서 넘어갔습니다. 그 길 위에 서민들의 애환과 삶이 녹아있는 것이죠.”

 옛 보부상 길 입구에는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라는 송덕비 두 개가 서 있었다. 돌이 아닌 철로 만든 기념비다. 1890년경 보부상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했다.

 - 보부상을 위한 비는 흔치 않을 텐데요.

 “『객주』 10권을 구상하게 된 포인트가 그것이에요. 울진에는 보부상이 정착했던 터가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떠돌기만 한 게 아니라 정착촌을 세웠다는 건 상당히 의미가 큰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착촌에서 일종의 이상향을 꿈꿨던 거죠. 울진의 옛 기록을 보면 보부상이 가난한 이웃에게 기부했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보부상 길 입구에 있는 두 개의 비는 그런 은덕을 기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길 위의 보부상이 아니라 보부상의 정착기를 10권의 테마로 삼은 이유입니다.”

 - 철로 만든 비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이 불망비는 일제강점기 때 철을 강제로 수거할 당시 마을 사람들이 땅에 파묻었다가 해방 이후에 다시 세운 거라고 합니다. 보부상들의 사회적 기여를 높이 샀다는 증거겠죠.”

 작가는 현재 서울과 울진을 오가며 『객주』 10권을 쓰고 있다. 9권에서 월이와 함께 떠난 천봉삼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고,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감을 드러내는 이야기 등이 담길 것이라고 한다. 늦어도 내년 3월께 10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객주』 10권 발간에 즈음해 작가의 고향인 경북 청송에는 ‘객주 문학마을(2013년 12월 완공 목표)’도 조성될 계획이다. 청송 진보시장 인근에 옛 장터를 재현한다. 올 하반기엔 『객주』 관련 자료가 전시될 ‘객주 문학관’도 착공을 앞두고 있다. 30일엔 객주 문학마을 조성을 기념해 청송 지역 다문화 가정 120가구를 초청하는 축하 공연도 열린다.

 - 『객주』의 30년 생명력은 뭘까요.

 “『객주』에는 길바닥 인생의 애환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을 극복해가는 의지랄까, 질긴 생명력이 꿈틀대죠. 가난한 시절을 겪었고, 객지를 떠돌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그런 정서가 제 몸에 잘 맞기도 합니다. 10권으로 30년 만에 마무리될 『객주』를 통해 삶이 고달픈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객주』=조선 후기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그린 대하소설. 김주영은 노트 11권 분량의 우리말을 채집해 이 소설을 썼다. 우리 민족 고유의 ‘입말’이 살아있는 소설로 평가된다.

 ◆울진 옛 보부상 길=울진군 두천 1리에서 봉화군 춘양면에 이르는 길. 조선 후기 이 지역의 유일한 상로(商路)였다. 현재 울진군에서 ‘금강소나무숲길’이란 명칭으로 일부 구간을 개방했다. 홈페이지(http://uljintrail.or.kr)를 통해 예약·관광할 수 있다.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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