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대는 세상에 저 생뚱맞은 소박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0호 27면

은과 법랑으로 만든 러시아산 사모바르. 19세기 말에 생산됐다. [위키피디아]

언젠가 전해 들은 얘기다. 공병우 타자기를 고안한 의학박사 공 박사가 생전에 무척 특이한 분이셨단다. 가령 멀쩡한 새 구두 뒤축을 처음부터 꺾어 신고 다녔다고 한다. 뒤축만 꺾으면 1단계로 신을 수 있는데 왜 번잡하게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것이다. 구두 신는 시간까지 번거로워 하는 인생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알 것까지도 없겠으나, 어쨌거나 쇠고집은 질기다.

詩人의 음악 읽기 미샤 엘만의 크라이슬러 곡

이건 내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조풍연 선생이라고 한 시대를 풍미한 문객이 있었는데 이 분이 클래식 음악광이었다. 원반을 구하면 딱 한 번만 듣는다고 했다. 그 한 번이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기 위한 것.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주야장천 카세트로만 음악감상을 한다는 건데 그 현격한 음질 차이는 상관이 없으신 건가? 게다가 보유한 음반 수가 참 많았는데 그처럼 아껴서 도대체 어느 천년을 끌고 가시려 했는지.

공병우·조풍연 식 쇠고집이 내게는 없나 찬찬히 생각해 보니 늘 주위의 놀림을 받아 온 습관이 하나 있다. 일생을 자취생활로 버티고 있는 나는 먹을 것을 버리지 못한다. 밥이 아주 오래되면 노란색을 지나 까맣고 딱딱하게 변한다. 그걸 뜨거운 물에 풀어 반드시 먹는다. 곰팡이 핀 식빵은 요리조리 비켜가면서 다 먹는다. 일전에 유효기간이 1999년으로 된 잼을 냉장고에서 발견했는데 그냥 먹었다. 가장 흔한 경우는 양이 많을 때다. 숨을 몰아 쉬며 짜구로 나뒹굴어질 때까지 다 먹는다. (나는 하루 한 끼만 먹는 날이 대부분이다.) 음식에 관해서 언제나 주장하는 말이 있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농담인 줄 알았던 동행이 기막혀 하는 풍경이 식당에서 자주 벌어진다. 먹을 걸 버리느니 차라리 내 몸이 아픈 것이 낫다는 굳은 신념!

수입이 빌빌해 요즘은 오디오를 건드리지 못하는 대신 커피 기구 주위만 맴돈다. 이베이에 점 찍어 놓은 워치리스트가 수십 가지가 넘는다. 기질이 비슷한 사진작가 친구 윤광준과 늘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돈 잘 못 버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재력이 왕성했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요즘 관심은 한 100여 년 전의 사모바르(samovar·큰 사진)들이다. 유목민들이 이동 중에 숯이나 장작을 넣어 차를 끓이던 간이 보일러 기구인데 파라핀 오일을 사용하게 고안된 물건이 꽤 나온다. 내가 사용하는 오디오 가운데 1930년대산이 많은데, 19세기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그 시절 아라비아를 떠돌던 사모바르에 보글보글 끓이며 유성기 복각 음반으로 듣는 미샤 엘만 연주의 크라이슬러 곡이 독일산 ED나 EL156 진공관에 울리면 아, 나는 떠나간다. 막 떠나간다. 어디로?

‘니힐과 아나키즘을 헤매던 젊은 날을 지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김갑수…’. 어떤 분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시사토론회에 나가 격한 발언을 쏟아냈더니 SNS상에 잠시 내 이름이 떠돌았는데 ‘삶이 괴로워서…’ 운운했던 내 첫 책을 읽은 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니힐과 아나키가 진정 내 몫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대한민국살이가 괴로웠던 것은 틀림없다. 도대체 무슨 수로 행복, 성공 운운할 수 있는 거지? 이 납작한 세상 속에서. 이 팍팍한 세간 안에서. 이 허황된 자유 속에서.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전편에 숨 막히게 거듭 등장하는 ‘치욕’이 내게는 일생의 언어였다.

그래서 음악이었다. 음악은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거주지다. 거기에는 갈 수 없는 지난 세기가 있고 모르는 언어가 있고 국가도 없고 정부도 없다. 자아 과잉의 품행 제로 몸부림이 아무렇지도 않게 뛰놀 수 있고 윤리도덕의 족쇄는 개목걸이로도 쓰지 않는다. 그런 어떤 장소가 음악 안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그게 실은 참… 민망하다. 그런 음악으로의 도피가 현실을 바라보는 언어로 옷을 갈아입으면 럭셔리 진보, 강남좌파가 된다. 아으, 민망하오, 김진 논설위원….

간혹 자동기술 상태로 씌어지는 문장이 있다. 지금이 그렇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분명한 것은 지금 듣고 있는 미샤 엘만(작은 사진)의 조촐하고 소박한 바이올린 연주가 엄청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이다. 현실 안에 이해갈등과 이념 충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그 모든 끓는 물을 담는 더 큰 그릇이 음악 혹은 예술이지 않을까 하는 환상. 내가 먹는 까맣고 딱딱한 밥알이 전혀 누추하지 않고 꺾어 신는 새 구두 뒤축이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세계. 저기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은 집단지성으로 진화하고 있다는데 그 진화론의 종착지가 혹시 예술세계가 아닐까 하는.

19세기 운운하다가 느닷없이 그리워지는 현실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랑 동갑인 포크 여가수 빅토리아 윌리엄스. 그것은 부서진 세계의 음성, 세상이 불편한 사람의 톤. 그중 ‘크레이지 메리’가 아니, 그녀의 모든 노래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