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에 숨겨진 경제 비밀

중앙일보

입력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에 사용되는 2기가헤르츠(G㎐)대역의 주파수폭 60M㎐가 연말까지 3조원 이상에 팔린다.

이 대역은 원래 군(軍)이 통신용으로 쓰던 주파수. 쓸모없던 주파수 대역이 IMT-2000용으로 지정되면서 하루 아침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둔갑한 것이다.

영국은 경매를 통해 이 주파수대역을 30조원을 받고 팔았고, 독일 정부는 무려 50조원 이상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IMT-2000에 쓰이는 60M㎐의 주파수폭은 정부가 관리하는 전체 전파의 0.001%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통신업체들은 1M㎐의 주파수라도 더 받기 위해 조(兆)단위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

이 주파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IMT-2000사업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파라고 모두 비싼 것은 아니다.

IMT-2000의 바로 옆 주파수 대역은 섬지방 통신과 아마추어 무선(햄)용으로 지정돼 있다.

정부는 이 대역을 한푼도 받지 않고 공짜로 빌려주고 있다.

정통부의 이근협 전파방송기획과장은 "같은 전파라도 영업용이면 비싼 값을 받고 공익을 위해 쓰이면 공짜나 다름없다" 고 말했다.

한국은 노른자위 주파수 대역을 차지한 지상파 방송국에 전파사용료를 면제해주고 있어 전파료 수입이 상대적으로 적다. 지난해 정통부는 전파사용료로 2천5백억원을 거둬들였을 뿐이다.

일찌감치 전파의 경제적 가치에 눈을 돌려 짭짤한 이익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멀티넷의 정연태(44) 사장은 현대판 봉이 김선달. 그는 미국의 틈새 주파수를 싼 값에 할당받아 꼭 필요한 회사에 비싼 값을 받고 판다.

정사장은 1996년 미 정부가 다채널 다중서비스(MMDS)용 주파수를 경매했을 때 펜실베이니아주의 앨런타운(인구 75만명)과 푸에르토 리코(2백50만명)지역의 주파수를 1백30만달러에 사들였다.

4년이 지난 지금 이 주파수의 시장가치는 20배 가까이 올라 2천5백만달러에 이른다.

MMDS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이 주파수 대역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이다.

미국 전역의 MMDS 주파수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월드콤과 스프린터가 정씨의 주파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정보통신 표준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3천G㎐이하의 주파수를 전파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파수가 9K㎐ 이하이거나 2백75G㎐ 이상인 전파는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하다.

낮은 주파수의 전파를 잡으려면 집채만한 안테나가 필요하고, 주파수가 2백G㎐를 넘으면 전파의 힘이 약해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면 아예 먹통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체 전파의 95%가 넘는 2백75G㎐이상의 주파수 대역은 우주에서 날아오는 미약한 전자파를 잡는 전파천문용으로 쓰이는, 버려진 공간으로 남아있다.

정통부의 주파수과 사무실 벽에는 주파수 분배도(圖)가 붙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9K~2백75G㎐대역의 주파수를 혼신(混信)없이 알뜰하게 쓰기 위한 지도다.

정통부는 ITU의 기준에 따라 전체 주파수 대역을 6백36개로 나누고, 이를 다시 41가지 사용용도에 따라 잘게 쪼개놓고 있다.

정통부의 박정렬 주파수과장은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대역은 1백K~40G㎐에 불과하다" 며 "활용 대역을 넓히기 위해 신기술과 장비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고 말했다.

미국은 이동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벌써 주파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이 IMT-2000 사업을 자꾸 연기하는 속사정도 여기에 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전파가 체증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미 하원의 릭 바우처(인터넷 위원장)의원은 "2005년까지 미국은 3백50M㎐의 이동통신용 주파수 대역이 필요한데 현재 확보된 것은 그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고 경고했다.

반면 영국(3백M㎐)과 일본(2백50M㎐)은 이미 확보한 풍부한 이동통신용 예비 주파수를 바탕으로 한발 앞서 IMT-2000을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이 주파수 부족으로 쩔쩔 매는 것은 미군과 텔레비전 방송국 때문. 미국은 군사용으로 너무 많은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민간에 돌아가는 주파수가 적다.

또 휴대전화와 같은 대역을 사용하는 UHF텔레비전 방송사들이 많아 이들이 황금 대역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들 아날로그 방송사가 하루 빨리 디지털 방송으로 옮겨야 주파수 대역에 여유가 생기는데, 방송사들은 "디지털 방송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 며 미적거리고 있다.

이처럼 주파수 부족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한정된 주파수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한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용실적이 저조한 주파수를 회수해 사용효율이 높은 분야에 넘겨주는 주파수 재배치도 추진되고 있다.

새로 선보인 대표적 기술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이 기술은 한꺼번에 여러가지 신호를 보낼 수 있어 같은 주파수로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같은 정보량을 더 좁은 주파수로 주고받을 수 있는 협대역폭기술의 발전도 눈부시다.

가령 25KHz나 차지했던 경찰 무전기용 주파수대역은 협대역폭 기술 덕분에 이미 절반(12.5KHz)으로 줄어들었고, 지금은 이를 다시 6.25KHz로 좁히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전파강국을 향한 길은 멀다. 한국이 아직 40GHz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상태에서 미.일.유럽은 벌써 60GHz대역까지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기술개발을 마치고 전파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