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직원 포함 '주가조작단', PC방서 메신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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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체 과장인 송모(35)씨는 2010년 회사가 ‘에스코어’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인수하면서 에스코어 재무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 기업 측은 송씨를 에스코어에 보내 놓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다. 실질적인 자금 흐름은 송씨만 알았다. 통장 입출금까지 직접 하던 그는 회사 돈 20억원을 꺼내 주식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 11월 송씨는 인터넷 메신저에 개설된 소그룹에서 회사원 이모(29)씨를 알게 됐다. 이씨는 2010년 주가조작 혐의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었다. 여윳돈이 있다는 송씨의 얘기에 이씨는 2010년 구치소에 있으면서 안면을 텄던 우모(27)씨와 대학생 김모(19)씨를 떠올렸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씨는 주가조작에 가담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터였다. 이씨는 송씨에게 “작전을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며 우씨와 김씨를 소개했다.

 송씨는 같은 해 12월 20일 서울 강남역 인근 B룸살롱에서 우씨와 김씨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이 룸살롱은 지난해 10월 중앙선관위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을 한 일당이 범행을 모의한 곳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씨는 주가조작의 ‘기본기’를 청산유수로 늘어놨다. 그럴싸한 허위 정보를 애널리스트 등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퍼뜨려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실무는 지방 모 대학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김씨가 맡았다. 그는 “엊그제(12월 17일) 북한 김정일이 사망해 온 나라가 김정일 얘기뿐이니 북한 관련 루머를 퍼뜨려야 효과가 클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들은 ‘거사 일자’를 올해 1월 6일로 잡았다. 핵심 실무자인 김씨가 그날을 꼽았기 때문이다. 우씨와 김씨 등은 1월 5일 저녁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모텔에 투숙했다. 이튿날 오후 1시48분쯤 해운대구의 한 PC방에 들어가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증권 전문가 203명에게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북한 경수로 폭발, 방사능 유출, 북서풍 타고 서울로 유입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일본어 문장도 집어넣고 합성한 폭발 사진도 첨부했다.

 송씨는 경기도 분당의 사무실에서 이들과 전화 연락을 하며 주식을 사고팔았다. 유언비어로 주가가 떨어질 때, 향후 증시가 진정돼 반등할 때 모든 상황을 상정해 놓고 주식워런트증권(ELW·equity-linked warrant) 등 파생상품을 거래한 것이다. 송씨는 우씨 등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 횡령한 회사 돈 20억원 가운데 1억3000만원만 투자하고, 부산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우씨 등의 루머 유포로 코스피 지수는 1824.29를 기록하며 전일 종가인 1863.74 대비 40포인트 가까이 급락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2900만원의 시세차익을 챙겼다. 수익은 투자자인 송씨 50%, 실무를 담당한 우씨 등 3명 50% 비율로 나눠 가졌다. 우씨와 김씨는 이달 초에도 한 제약사가 백신을 개발했다는 허위 기사를 홍보대행업체를 통해 유포해 3200만원을 벌어들였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21일 송씨와 우씨, 김씨를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범행에 가담한 이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송씨가 횡령한 회사 돈 20억원 가운데 12억원은 주식 투자로 날린 것으로 확인됐으며 추가 손실액을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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