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PC판매 성장률 아시아 1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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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도쿄의 대학생 히데키 사이토는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의 컴퓨터 상점들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 컴퓨터의 정보 처리 속도나 기억 용량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사운드 시스템이 잘 돼 있나, 게임 영상이 얼마나 선명한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얇고 가볍고 좀 멋있는 것은 없느냐”며 투덜거렸다.

사이토의 이 같은 구매 형태는 아시아에서 아직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에는 디자인이 컴퓨터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독특한 문화가 형성돼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가정용 컴퓨터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컴퓨터를 처음 구매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의미다.

올 3분기 아시아 지역에서는 1천5백만 대의 컴퓨터가 팔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는 전세계 시장의 18%에 해당되는 것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빠른 속도로 시장 규모가 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관심 등으로 지난 2분기 아시아의 컴퓨터 판매 실적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50% 가량 성장했다. 시장분석가들은 2004년이면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컴퓨터 시장이 1천억 달러 규모로 늘어나 전세계 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할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대부분의 가정에 컴퓨터가 있어 신형으로 바꾸거나 자녀들을 위한 제2의 컴퓨터를 구비하도록 하는 게 주요 판매 전략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판로 개척에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아직 1백 가구 중 한 가구 꼴로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로 아시아에는 넓은 새 시장이 있다. 인도 역시 현재 컴퓨터 판매량이 미국 국내 판매량의 3% 정도밖에 못미치고 있지만 막대한 인구에서 비롯되는 잠재적 수요는 엄청나다.

아시아의 컴퓨터 시장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컴팩·IBM·델·휴렛패커드 등의 거대 제조업체가 맥을 못쓰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레젠드, 한국에서는 삼성, 일본에서는 NEC나 후지쓰, 대만에서는 에이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을 예로 들면 레젠드는 원색을 선호하고 색감에 민감한 중국인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색의 컴퓨터를 생산하고 있으며, 인터넷 초보자를 위해 키보드를 한 번만 누르면 자동으로 인터넷에 접속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 중국어 음성 인식·한자 표기, 그래픽 프로그램 제공 등 자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에 아직 각 나라의 토착 기업에 비해 생산·가격·유통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해외 기업들은 최근 아시아 시장에 대한 새로운 공략을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에서는 크고 단단해 보이도록 만드는 등 각 국가에 맞는 판매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휴렛패커드와 컴팩은 이미 기본 모델의 무게를 줄인 노트북 컴퓨터를 일본 시장에 내놓고 있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또 아시아 지역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장을 형성한다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지난 2분기 아시아 지역 노트북 시장은 90% 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상당수 아시아 국가에서는 노트북 소유가 신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노트북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기업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가격 경쟁력이다. 서구에선 이미 고급 컴퓨터 시장으로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데 아시아 시장에서는 자체 조립 브랜드들이 폭넓게 시장을 차지하고 있어 중저가 중심으로 판매가 되고 있다.

그래서 IBM 등 미국의 거대 컴퓨터 업체들은 일반인이 아닌 사업자들을 상대로 판로를 넓혀가고 있다. 컴퓨터를 판매하며 전자상거래 운영 체계나 시스템 통합 서비스 등을 제공해 구매자가 한 번에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거의 모든 다국적 컴퓨터 회사들은 중간 판매인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 등을 통해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해 가격을 더욱 낮추는 전략도 도입하고 있다. 델은 중국에서 전체 판매량의 40%를 온라인으로 주문받았으며 한국·인도 등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매출을 늘려가고 있다.

이 같은 거대 기업들에 아시아 시장이 아직까진 매력적인 곳은 아니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학생과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산 교육을 시키는 등 컴퓨터에 대한 집단적인 바람이 계속 불어 한 번의 계약으로 수천 대씩 팔 수도 있다는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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