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가 탈북자 북송 위기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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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민주화위원회, 탈북자를 걱정하는 변호사들 등 인권단체 회원들이 14일 서울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과 함정수사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 서경석 목사. [연합뉴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가 중국 공안에 탈북자들이 체포된 사실을 공개하는 바람에 이들의 석방과 한국행이 무산될 위험에 빠졌다. 탈북자 문제가 공개될 경우 중국 당국은 북한을 의식해 경직된 반응을 보이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병을 놓고 중국 당국과 비공개 협의를 해온 우리 정부 당국자와 인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탈북자 지원단체인 북한인권개선모임 김희태 사무국장은 14일 “인권위의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목숨 걸고 탈북한 10대 청소년 2명이 북송 될 위기에 처했다”며 “인권을 얘기하는 인권위가 탈북자의 인권을 오히려 사각지대로 내몰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8일 중국 선양(瀋陽)에서 브로커의 도움으로 한국행에 나선 탈북자 10명이 제3국으로 향하는 남방행 버스를 탔다가 현지 공안에 체포됐다. 김정일 사망 후 북한이 ‘탈북자들은 3대를 멸족시키겠다’고 공언한 후 중국 공안의 단속이 부쩍 강화된 탓이다. 체포된 사람 중엔 부모를 잃고 한국에 먼저 정착한 형과 누나를 만나기 위해 탈북한 16세 소년, 한국에 정착한 부모를 만나기 위해 탈북한 19세 소녀도 있었다. 김 국장은 “이들이 체포됐다는 브로커의 연락을 받고 우리 청와대와 외교통상부·국가인권위원회에 상황을 알리는 팩스를 보냈다”고 말했다.

 문제는 닷새가 지난 13일 벌어졌다. 이날 오후 연합뉴스가 이를 “체포된 탈북자들이 인권위에 긴급 구제신청을 냈다”고 보도한 것이다. 곧이어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이들 외에 24명의 탈북자가 체포돼 북송위기에 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14일 “팩스로든 구두로든 인권위에 긴급 구제신청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인권위 관계자에 따르면 13일 열린 공개 전원(11명) 위원회에서 김모 위원이 ‘아는 사람한테 탈북자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들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떠냐’고 말한 게 ‘긴급 구제신청’ 보도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인권위를 통해 탈북자들의 체포 사실이 공개되자 외교부는 즉시 인권위에 엄중 항의했다. 김 국장은 “외교부의 협조로 비공개리에 이들의 석방을 추진했고 일부 진전도 있었다”며 “인권위가 이를 공개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인권위 관계자는 “우리도 탈북자 문제에서 보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해프닝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선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익명을 원한 인권단체 인사는 “자신들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탈북자 사건만 있으면 자신이 해온 일처럼 이슈화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며 “평상시 가만히 있다가 탈북자들이 체포된 뒤 떠들어대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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