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고공행진] 변죽만 울린 증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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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에는 백약이 무효인가. 9월 들어 폭등세를 거듭하고 있는 국제 유가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증산 합의에도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없다.

지난 12일 일단 내림세로 돌아섬으로써 다소 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석유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폭등세에 대한 일시적 조정현상에 불과하다며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다. 고유가는 유럽에서 항의 시위를 불러일으키는 등 정치.사회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 증산 결정에도 진정되지 않는 고유가=수급 불안을 해소할 만큼의 증산이 이뤄지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다.

지난 10일 OPEC가 합의한 하루 80만배럴 증산은 사실상 하루 10만배럴 증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미 지난 7월부터 하루 70만배럴씩 증산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절기를 앞두고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미국 경제의 호황과 아시아.유럽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도 석유 수요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석유연구소(API)는 이를 근거로 올 4분기 세계적 공급 부족은 1백80만배럴을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실질적인 증산 시기도 문제다.

발표대로 다음달 1일부터 증산에 들어갈 경우 증산 물량이 석유 소비국에 도착돼 정제 과정을 거치고 시장에 투입되려면 연말이 돼야 한다.

증산 양을 따지기 전에 시간적으로도 올 겨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증산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는 것이다.

OPEC는 최근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국가의 석유제품 소비세가 60%를 넘고 재고 관리에 실패한 게 고유가의 주 원인이라며 화살을 소비국으로 돌리고 있다.

또 추가 증산에 긍정적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온건파와 이에 반대하는 이란.베네수엘라 등 강경파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OPEC 내부 합의도 어려운 실정이다.

알리 로드리게스 OPEC 의장은 11일 이같은 요소를 모두 감안할 때 세계는 이미 에너지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올 겨울 유가가 배럴당 40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 고유가 항의 시위 확산=프랑스에서 발화한 유가 폭등 항의 시위가 벨기에.독일.네덜란드.아일랜드.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대륙을 거쳐 마침내 영국으로까지 번졌다.

영국의 화물차 운전사들이 10일 시작한 시위에 농민과 택시 운전사들이 가세하면서 12일에는 영국 전역의 정유소.유류저장탱크 가운데 4분의3이 시위대에 의해 봉쇄됐다.

석유 유통망이 마비되면서 전국 주유소 5곳 중 1곳의 재고가 바닥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시위 발생 다음날 "영국의 석유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 며 협상에 나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블레어의 이같은 강경 대처 방침이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여론이 시위대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북해 유전 덕분에 현재 세계 9위의 산유국 지위를 누리고 있는 영국은 국제 원유가 폭등으로 연간 40억파운드(약 6조6천억원)의 잉여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측근조차 "휘발유 ℓ당 8펜스 정도의 세금은 즉각 인하해도 된다" 며 블레어의 강경한 태도에 못마땅한 반응을 나타냈다.

한편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는 "고유가 문제는 매우 복잡한 사안으로 공조체제 구축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 라며 유럽연합(EU) 긴급 각료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대규모 시위는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소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벨기에에서는 고속도로전문운송노조 소속 대형트럭들이 브뤼셀 중심부로 이어지는 도로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여 곳곳에서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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