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서양화展〉인사아트센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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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해일처럼 일어선 엄청난 파도의 벽에서 배들이 수직으로 떨어져내리는 영화 〈퍼펙트 스톰〉의 바다는 약과다.

이상국의 바다는 큰 파도나 해일같은 것을 훌쩍 넘어선,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아래쪽에는 정상적인 수평의 바다가 낮게 자리잡고 있다. 그 수평선 위쪽 하늘이 있어야 할 공간에는 또 하나의 바다가 수직으로 일어서있다.

깊고, 푸르고, 거대한, '하늘 바다'다. 길이 5m80㎝에 이르는 대작이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가 제주도를 엄습해오는 폭풍의 바다, 격랑의 바다를 그렸다면 이상국은 현실을 넘어선 영원의 바다를 그려냈다.

시퍼런 바다 표면과 그 위에서 들끓어 오르는 희푸른 파도는 거칠다. 바다는 하늘로 변한 채 일순 정지해있다. 한장의 스틸사진이 아니라 언제라도 필름이 다시 돌 것같은 영화의 정지화면 처럼 말이다.

관객은 바다가 다시 일어서 덮쳐올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그리곤 이 것이 정지화면이라는 데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1996년 훌쩍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난해 귀국한 서양화가 이상국(53)씨가 마음으로 해석한 바다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씨는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40여점의 신작을 전시 중이다. 17일까지. 94년 이후 6년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전시작은 '바다' 시리즈 15점과 '산' 시리즈 15점, 정물과 소품 10여점 등이다. 1천호짜리 대작도 있다. 그의 기법은 대담한 화면구성, 짧게 끊어친 나이프 자국, 굵고 힘찬 붓터치가 특징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허허바다' '해지는 바다' '바다-밤' 등의 시리즈.

'바다-밤Ⅱ'는 괴로움의 바다에 드리워진 십자가를 연상케한다. 흰 달이 밤바다에 길게 그림자를 비춘다. 바다는 파도로 가득차 있다. 파도는 그런데 꾸무럭 거리며 기어가는 인간들처럼 보인다.

붓질 하나에 사람 한명, 그 몫의 고통 하나. 괴롭게 기어가는 인간군상들이 모여서 이루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고해다. 그러고 보니 달 그림자는 십자가의 아랫부분 모양이다. 달은 머리처럼 떠있다. 팔을 벌리고 선 형체는 순교자인지 구원자인지 불분명하다.

작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무는 동안 현지의 광활한 바다와 산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한다.

70년대에 쓸쓸한 산동네 겨울풍경과 공장지대 등의 민중적 서정성이 있는 작품을 그렸던 그는 90년대 초중반에는 추상적이고 기호화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또 다른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나는 자유롭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림 그 자체는 자유다"라고 말했다.

73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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