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삭발 단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3호 38면

대학 때 나는 삭발 단식농성을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한 운동권 출신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벌써부터 귀가 빨개진다. 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수업에 빠지고 교내 잔디밭에서 책을 읽거나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기 일쑤였다. 핑계는 많았다. 날씨가 좋아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나는 수업에 빠지고 책이나 술에 빠졌다. 당연히 학점이 나빴다. 그러면 나는 나쁜 학점마저 핑계로 삼았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나는 그런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스스로도 한심해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결심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결심만큼 허약한 게 없다. 반면에 습관만큼 강한 것도 없다. 습관은 힘이 세다. 습관의 관성을 바꾸는 일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 같아 자칫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어떻게든 생활습관을 바꿔보려고 나는 삭발을 해버렸다. 제법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내보려고 도서관으로 들어서는데, 나처럼 삭발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같은 하숙집에 사는 총학생회 간부 녀석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동무를 한다. “혼자 따로 삭발하면 어떡해, 같이 했어야지. 오늘 민주광장에서 삭발식 했는데 몰랐어? 아무튼 잘됐다. 교내 한 바퀴 돌 텐데 함께하자.”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동참을 권하는 녀석의 표정도 비장했고 무엇보다 어깨동무를 한 팔심이 셌다. 녀석은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운동권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운동권 학생들과 함께 어깨를 겯고 구호를 외치며 교내를 한 바퀴 돌았다. 민주광장에 도착한 후 대오에서 슬그머니 빠지려는 나를 또 그 녀석이 붙잡았다. 단식농성에 들어간다면서. 원래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인 데다 방탕한 생활 때문에 장이 나빠져 안 그래도 단식을 해보려던 참이라 참여하게 됐다.

삭발 단식농성을 한다고 사흘쯤 민주광장에 앉아있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구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밥을 굶는데, 나는 ‘빵꾸’난 학점이나 채우고 장 트러블을 고쳐볼 수작으로 이렇게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사흘째 밤에는 학생회 간부 녀석이라도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나흘째는 나도 시위에 참가했다. 배가 고파 서 있을 힘도 없는데 구호를 외치고 운동가를 불렀다. 돌과 화염병도 던졌다. 며칠째 계속되는 시위에 독이 바짝 오른 전투경찰들이 교내로 진입했다. 여기저기 최루탄이 터졌다. 다행히 시위하던 학생들은 모두 달아났다. 허기져 몇 발 뛰다가 쓰러진 나만 빼놓고.

나는 슬로모션으로 보았다. 최루탄 연기를 헤치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전투경찰들의 곤봉과 방패와 군화를.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그렇게 많이 맞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나는 전리품처럼 경찰들이 진을 친 곳으로 질질 끌려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삭발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었는데. 단식을 하더라도 뭘 좀 몰래 먹어두는 건데. 경찰 버스에 타자 누군가 삭발한 내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이 새끼 완전히 빨갱이구먼. 이거 삭발한 거 봐.” 나는 용기를 내 나를 때린 경찰에게 말했다. “저 뭐 좀 먹을 것 없을까요?”


김상득씨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