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청 불법 현수막 … 그 제작비면 쌀이 200포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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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대전 서구청(구청장 박환용)이 청사 외벽에 지난 10월부터 석 달가량 내걸었던 현수막. 서구청은 최근 본지 취재가 시작되자 부랴부랴 걷어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23일 대전광역시 서구청(구청장 박환용)은 청사 서쪽 외벽에 걸었던 현수막 16개를 모두 철거했다. 지난 10월부터 3개월가량 설치했다가 본지 취재가 시작되자 부랴부랴 걷어낸 것이다. 서구청의 실무 담당자는 “바람이 많이 불어 현수막이 훼손됐고 이미 홍보가 많이 됐다고 판단해 철거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현수막 제작비용은 개당 40만~50만원. 설치비를 포함하면 50만원이 들어간다. 서구청은 현수막을 설치하는 데 800만원가량의 예산을 썼다. 비용은 각 실·과에서 부담했지만 주민들이 낸 세금이다. 서구청이 설치한 현수막은 ‘복지정책 평가 최우수’ ‘기업사랑 우수혁신 대상’ ‘산림분야 평가 최우수’ 등으로 주민생활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없다. 광주광역시 서구청에도 실적을 선전하는 현수막 4개가 설치됐다. 행정안전부 주관 민원행정 우수, 보건복지부 주관 보건사업평가 최우수상 수상 등의 내용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현수막 공화국이 됐다. 연말을 맞아 단체장 성과를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수상도 이때 집중된다. 단체장 입장에서는 이만한 자랑거리가 없다. 돈이 얼마나 들어가든 자신의 치적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공무원들도 단체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서별로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하지만 수상 내용은 다른 자치단체와 다를 게 없다.

 27일 오후 대전 유성구청(구청장 허태정) 청사 외벽에도 현수막 6개가 내걸렸다. ‘녹색도시 조성 최우수’ ‘대전시 주관 클린도시 종합평가’ ‘하수행정 최우수기관’ 등의 내용이다. 현수막은 세로 크기가 10m를 넘는 초대형이다. 대부분 구청과 구청장의 치적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정작 주민들에게 필요한 제도 변화나 정책을 알리는 현수막은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광고물 설치법상 건물 외벽 현수막 설치는 불법이다.

 자치단체는 단체장 치적을 알리느라 불법도 서슴지 않고 있다. 불법을 단속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불법을 저지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행법상 공공건물을 포함해 건물 외벽에 현수막을 설치하면 크기별로 건당 8만~75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75만원짜리 과태료는 크기가 8.1m를 초과한 경우다. 대전 서구청에 설치됐던 현수막은 크기가 10m를 넘기 때문에 최고 금액에 해당한다. 익명을 원한 서구청의 도시환경국 직원은 “불법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나”라며 “일반 건물을 기준으로 법대로 과태료를 부과하면 1200만원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치단체의 예산 낭비와 불법에 대해 시민들은 “연말이면 보도블록을 새로 깔고 남은 예산을 허비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치적까지 홍보하느냐”며 “차라리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서구청이 현수막 제작에 쓴 800만원이면 20㎏들이(5만원) 쌀 200포대를 구입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치적 홍보와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관보나 소식지·홈페이지 등을 통해 수상 내용을 알려 예산 낭비를 막는 방법이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문창기 사무국장은 “불필요한 현수막에 들어가는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한 사람이라도 더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글=신진호·유지호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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