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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어리석음은 나란히 걸으며 회한이 그 뒤를 따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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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흔히 쓰이는 말 중에 ‘노발대발’이란 게 있다. 참맛도 없고 멋도 없는 말이다. 어쩌다 그리 ‘저렴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그게 아닌 ‘노발충관(怒髮衝冠)’이었다. 이런 사연이 있다.

 전국시대 때 조나라 혜문왕이 귀중한 옥구슬을 손에 넣었다. 소문을 들은 이웃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은 15개 성(城)과 그 보물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해진 혜문왕은 명재상 인상여에게 보물을 들려 진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소양왕은 성을 내줄 생각은 안 하고 은근히 협박을 하며 보물만 빼앗으려 하는 게 아닌가. 이에 인상여는 소양왕의 염치없는 행동을 준열하게 꾸짖었는데, 이때 ‘매우 분노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바람에 갓이 벗어질 정도(怒髮上衝冠)’였다는 것이다.

 갓을 찔러 들어올릴 만큼 머리카락이 곤두섰다니, 궁지에 몰린 고양이만큼이나 분노의 깊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지 않나. 누가 이런 재기 넘치는 표현을 했을까. 다름 아닌 사마천의 글솜씨다. 그것이 노발대발로 바뀐 것은, 관을 쓰는 풍습이 사라진 탓도 있지만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세태의 반영일 수도 있을 터다. 일단 화가 나면(怒發) 좀처럼 제어가 안 되고 커지기만 하는(大發) 요즘 사람들 말이다. 분노가 증오로 바뀌는 게 실시간이다. 묻지마 방화나 살인이 그래서 나온다.

 나쁜 면만 볼 일은 아니다. 소셜미디어가 발전한 오늘날에는 노발대발이 더 적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시사주간 타임(TIME)의 해석이 그렇다. 타임은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선정했다. 시위의 출발점은 분노다. 개인적 분노(怒發)가 소셜미디어의 날개를 달면서 대규모 시위(大發)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공공화된 분노인 시위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투표로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시위로 실현해 낸 것이다. ‘아랍의 봄’은 말할 것도 없고 아테네, 월스트리트,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이끌어냈다.

 “때론 위험하게도 했지만 세상을 보다 민주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타임의 선정 이유다. 바꿔 말하면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늘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다. “분노와 우행(愚行)은 나란히 걸으며 회한이 양자의 뒤꿈치를 밟는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경고가 그런 뜻이다. 치명적 후회를 막으려면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분노가 증오라는 종착지에 도착하기 전에 냉정이라는 정거장을 지나야 한다는 말이다.

 노발대발의 어원이 노발충관이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도 도움이 되겠다. 대발하기 전에 충관하는지 살피다 보면 절로 냉정의 시간을 갖게 되지 않겠나 말이다. 필요하면 모자라도 쓸 일이다.

이훈범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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