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조선의 9급 공무원, 500년 버텨낸 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조선의 9급 관원들,
하찮으나 존엄한
김인호 지음, 너무북스
320쪽, 1만6500원

요즘 사극은 ‘하찮은 신분’이 대세다. 드라마 ‘추노(推奴)’에선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다니는 이가 주인공이다.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노비, 돈을 받고 그들을 추적하는 자, 돈을 주고 노비를 잡아들이려는 양반….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 시대의 노비는 어떤 존재이고, 양반에게 노비란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로 인해 추노라는 낯선 직업이 당시엔 꼭 필요했을 거란 사실까지 알게 된다.

1636년(인조4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행렬도 부분. 고위관리인 정사는 가마를 타고 있고, 그 뒤 두 번째에 하급관리였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관이 말을 타고 따라가고 있다.

 ‘동이’에서는 궁궐의 ‘감찰부 나인’이 주요 등장 인물이다. 얼굴이 고와 임금의 승은(承恩)이나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를 넘어, 음모와 맞서는 ‘수사관 궁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조선의 여성’을 발견한다.

 하찮으나 존엄한. 저자가 이런 부제를 단 것도 요즘 사극의 흐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은 조선의 다양한 하급 관원들을 소개한다. 호랑이 사냥꾼 착호갑사(捉虎甲士), 시간을 알려주는 금루관(禁漏官), 관청의 심부름을 하던 소유(所由), 관리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구사(丘史) 등.

 책이 드라마와 다른 것은 실록 등 역사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역사서에 하급 관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반드시 그들의 팔과 다리가 되는 이들에 대한 얘기들이 곁다리로 등장하게 된다. 저자는 그런 작은 사료를 성실히 모아왔다. 저자인 김인호(광운대) 교수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등에 오늘날 신문 사회면의 단신처럼 남은 흔적을 찾아 왔다”고 했다.

 저자는 모든 것을 이야기로 보여주려 했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마치 소설을 쓰듯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사헌부의 말단인 소유(所由)를 소개한 부분에서는 장희빈 이야기가 등장한다. 1688(숙종 14)년 겨울에 장소의(후일 장희빈)가 왕자를 낳았다. 장씨의 어머니는 딸을 돌보기 위해 뚜껑 있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었다. 이런 가마는 3품 이상 관리의 부인이나 탈 수 있었다. 소유가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원칙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장씨를 사랑한 숙종은 분노했고, 단속한 소유를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책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노비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유로 유생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항의하는 그 시대의 완고한 신분제’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하급 관원들을 ‘조선의 실핏줄’이라고 표현했다. 국가가 거대한 유기체라면, 중추와 말단을 연결하는 맥이 되는 존재가 하급 관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선왕조가 허점 많은 구멍가게 같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조의 시스템은 그 이상의 규모와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 ‘500년을 버텨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하찮은 대접을 감수하고 존엄하게 일해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가능케 했다. ‘매 정권마다 5년도 버티지 못하고 망할 것처럼 모두가 난리지만, 실은 그 수십 년간 대한민국은 더욱 강해졌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대부분의 우리, 하찮지만 존엄한 존재 덕분 아닐까.’

강인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