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IT정치 ‘퍼스트 무버’된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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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최두환
KT종합기술원장·사장

요즈음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라는 표현이 널리 회자된다. 그간 우리는 선진 산업을 빠르게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적자)로서 성장을 구가해왔다. 그런데 어느새 선두대열 가까이 서게 되어 더 이상 누구를 따라 하는 것으로는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앞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가는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패스트 팔로어는 앞선 자의 뒤를 쫓아가며 잘한 것은 따라 하고 못한 것은 고쳐 할 수 있어 발전이 쉬웠지만, 퍼스트 무버는 누구도 해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가야 하기에, 성공하면 그 대가도 크지만 그만큼이나 위험부담도 크다. 최근 정보기술(IT) 확산으로 일어나는 행정과 정치에서의 변화를 한번 이 관점에서 살펴보자.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0년 TED 콘퍼런스에서 IT 발전이 가져다줄 행정의 미래에 대해 발표했다. IT가 발전하고 대중화되면서 정보혁명이 일어났다. 대중화된 IT와 정보혁명은 국민들이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이를 조정·판단·평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행정의 주권을 국민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이에 따라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투명하고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해질 것이라 역설했다.

 ‘유엔 미래보고서-2018년 한국’에서는 IT 발전에 따른 정치 변화에 대해 논의했다. IT 대중화로 국민 개개인의 정치 참여가 손쉬워지고, 의회와 정부가 중요 정보를 국민과 공유하게 된다. 온라인에서 다양한 토론의 장이 열리며, 국민 의사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생겨난다. 국민들에게는 과거처럼 정치적 결정이 있고 나서 통보되는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과 조정에 바로 참여하게 되는 ‘e-민주주의’가 진행된다.

 위 보고서가 예측한 다른 사회적 변화도 살펴보자. 먼저 오프라인에 기반을 둔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사회질서 파괴 현상이 생긴다. 정부·의회·사법이라는 민주주의 기본 구조가 의문시된다. 나아가 정치가 혐오 대상으로 약화된다. 정치에 대한 정보는 더 많이 노출되고, 이런 정보의 공유를 통해 국민들이 기성 정치를 경멸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는 정당의 무력화와 국회 결정의 평가절하로 나타난다.

 필요할 때 수시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플래시 몹(Flash Mob) 형태의 정치단체가 가능해진다. 사회적 네트워크의 지도자나 사회공헌을 많이 한 기업인들이 존경받는 사회가 된다. IT를 활용하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진다. 온라인 인지도에 기반한 권력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온라인 커뮤니티가 정치에 발을 내디딘다.

 재미있게도 이런 예측은 미리 각본으로 짠 것처럼 우리 현실정치에 나타나고 있다. 이를 지켜보면서 산업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퍼스트 무버가 되길 바랐었는데, 정치에서는 이미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IT정치에서의 퍼스트 무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퍼스트 무버는 개척에 따른 위험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데, 정치에서의 이런 위험부담은 자못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데….

 ‘말 없는 다수’보다 ‘말 많은 소수’가 득세하는 양상, 말에 책임지기보다 그냥 내뱉고 보는 양태, ‘카더라’가 불러오는 혼란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단기적인 이슈로 주의를 끄는 것에는 매진하지만 장기적인 이슈는 뒤로 밀쳐 나 몰라라 하는 풍토 등등. 여러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유엔 미래보고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이렇게 IT로 무장한 소수에게 그러지 못한 보수적인 다수가 밀리게 되고, 이것이 대세가 되어 ‘마이너리티 민주주의(minority democracy)’가 부상하게 되어, 말 없는 다수보다 말 많은 소수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IT정치에서 성공적인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이 우려에 대해 먼저 올바른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클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향성 설정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회 전체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기득권이 앞장서야 하는데, 어느 기득권이 이런 변화에 내켜 앞장서겠는가? 그래서 말 많은 소수가 방향을 조타하는 역할을 하게 되겠고, 이에 따른 위험부담은 말 없는 다수가 지게 될 것 같다. 이 걱정으로, IT정치에서는 차라리 우리는 패스트 팔로어가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최두환 KT종합기술원장·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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