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한국형 부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7호 31면

정부·여당의 관심사는 요즘 ‘부자’인 것 같다. 한나라당은 ‘한국판 버핏세’를 검토하고, 금융위원회는 외국 부자들이 많이 가입하는 ‘한국형 헤지펀드’ 도입을 추진 중이다.
공교롭게도 양쪽에서 부자의 기준으로 제시한 금액은 5억원이다. 한나라당은 연간 5억원 이상 소득자를 증세 대상으로 삼는다. 금융위는 헤지펀드 가입 금액을 최소 5억원으로 정해놓았다. 문제는 기준이 영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잘 이해할 수 없다. 세법 전문가와 금융권 인사들 사이에서는 ‘대충 5억원’으로 정한 졸속정책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On Sunday

한나라당은 연 소득 5억원 이상 1만 명에게 소득세 최고세율을 38~40%로 차별화하는 방안을 거론한다(현행 최고세율 35% 구간은 8800만원 이상으로 단일화). 왜 1만 명일까.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28년 전 소득세법 개정 당시 최고 세율을 내는 사람이 1만 명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홍 대표는 그동안 우리나라 인구가 증가한 것은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8년 전인 1983년의 인구는 3990만 명이었지만 지난해 말 4820만 명으로 늘었다. 그 사이 20%쯤 증가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지금은 그때보다 2000명쯤 더 많은 1만2000명을 최고소득계층으로 간주하는 게 마땅하다.

그렇다고 국민소득 증가치를 고려한 것 같지도 않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59달러였다. 83년 2076달러인 데 비해 10배를 넘는다. 소득 증가를 감안하면 어림잡아도 당시 최고세율 소득 8800만원 이상의 10배인 8억8000만원 이상 소득자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금융위가 말하는 헤지펀드 가입의 하한선인 5억원도 와 닿지 않는다. “미국의 하한선인 100만 달러(약 10억원)와 홍콩의 하한선인 5만 달러(약 5000만원)를 참고했다”는 게 금융위의 입장이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미국과 홍콩의 딱 중간인 5억원을 임의로 선택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가 5억원에 대한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홍콩에서 왜 그런 기준을 정했는지, 한국과는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상품이 잘 팔릴지도 의문이다. 영업 현장에서 고객 수요 조사를 해본 증권사 관계자들은 “하한선이 너무 높아 VIP고객 중에서도 가입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전한다.

정부·여당은 부자 증세를 말하는데 막상 부자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연 소득 5억원 이상의 대상자로는 고액 연봉을 받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떠오른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부동산 갑부나 주식으로 대박 낸 벤처기업 대주주는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동국대 이준서 교수(경영학)에 따르면 헤지펀드에 가입할 정도의 여유가 있으려면 부동산을 뺀 금융자산이 50억원을 넘어야 한다. 아무리 고액 연봉을 받는 CEO나 땅 부자라 해도 전문 투자자가 아닌 이상 현금을 50억원씩 굴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말만 요란한 부자 증세. 한국판 버핏세나 한국형 헤지펀드 도입에 앞서 누구든 납득할 만한 ‘한국형 부자’의 기준을 제시하는 게 먼저인 듯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