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넘어 한글 깨친 와세다대 출신 작가 실존주의 문학 추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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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35면

소설가 장용학. [사진 중앙포토]

1950년대 한국 문단에서 소설가 장용학은 매우 이질적이자 이단적인 존재였다. 그가 55년 ‘현대문학’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요한 시집』을 발표했을 때 문단과 독자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독자들은 “이것도 소설이냐” 혹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고, 문단 역시 “관념의 유치한 유희를 보여주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 혹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운 관념과 상징의 세계”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내렸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7> 이단적인 소설로 극과 극 평가, 장용학

그의 작가 활동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징후는 등단 초기부터 있었다. 그는 49년 말 연합신문에 첫 소설 『희화(戱畵)』를 연재했지만 문단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두 번째 작품 『지동설』을 들고 ‘문예’를 찾아갔지만 조연현 주간은 새로 추천받지 않으면 실어줄 수 없다고 맞섰다. 언쟁이 오가다 결국 장용학이 굴복해 추천 작품으로 실리게 되었고, 52년 피란지 부산에서 『미련 소묘』가 추천 완료 작품으로 실려 ‘공식적’으로 등단하게 된다.

기이하게도 장용학은 문학을 마음에 품은 20대 초반까지도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하고 있었다. 21년 함북 부령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중학(지금의 경복고교)을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교 상과에 재학 중 44년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광복을 맞았다. 귀국 직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누워 지내면서 그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국어사전을 빌려다 낱말 공부를 새로 시작했고, 이광수·김동인·이태준·박태원 등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40년대 후반까지도 장용학의 한글 실력은 아직 서툴렀고, 문단에 대한 지식은 무지에 가까웠다. 그가 처음 써서 ‘예술조선’의 현상공모에 응모한 단편소설 『환(幻)』은 예심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 쓴 200장 분량의 소설 『육수(肉囚)』는 김동리에게 건네졌으나 “앞으로 국어를 제대로 깨치면 좋은 작가가 될 것”이라는 소감만 전해 들었다.

52년 등단 후 그의 소설가적 행보에 확실한 이정표를 세워준 것이 사르트르의 『구토』였다. 제자가 선물로 준 『구토』를 읽고 그는 소설가로서 눈앞이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실존주의 문학’을 향한 나름의 개안이었다. 그 무렵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체험 수기를 읽고 그 이야기를 실존주의에 접목시킨 작품이 『요한 시집』이었다.

『요한 시집』 이후 장용학은 『원형의 전설』 등 계속해서 주목을 끄는 작품을 발표했지만 문단에는 얼굴을 잘 내밀지 않았고 문인들과의 관계도 소원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장용학은 작품만큼이나 난해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그랬던 것처럼 인물에 대한 평도 “괴팍하다”는 견해와 “신중하고 과묵하며 매사에 합리적”이라는 견해로 엇갈렸다. 그래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안병영은 50년대 후반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국어교사였던 장용학의 풍모와 인품을 이렇게 회고한다.

“…큰 몸집은 아니셨고, 우수에 찬 얼굴에 순수하고 진지한 분이셨다. 유난히 까맣던 머리와 눈썹, 거뭇한 턱수염 자국이 기억에 난다. 세상 물정은 전혀 모르실 것 같은 인상인데, 막상 수업 시간에 국어 문장의 속뜻을 캐 들어가실 때 보면, 이분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얼마나 면밀하게 관찰하고 계신지, 또 생각이 얼마나 깊고, 날카로운지 놀랄 때가 많았다.(중략) 선생님은 얼마간 기인(奇人)풍의 인물이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단지 인간화를 염원하던 꾸밈없는 보통인, 그 시대에 당연히 그랬어야 마땅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미 비인화(非人化)에 물든 우리의 일그러진 의식이 그를 기인으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장용학은 자의식이 유난히 강한 작가임을 여과 없이 드러낸 적이 있었다. 64년 ‘문학춘추’에 단편소설 『상립 신화(喪笠 神話)』를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같은 잡지 다음 호에 소장 평론가 유종호가 ‘시니시즘 기타’라는 제목의 작품 평을 발표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격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장용학이 반론을 쓰면서 유종호가 자신의 작품을 오독(誤讀)했다든가, 자신을 몇몇 서구 작가의 아류로 단정했다는 따위를 지적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자가 눈에 말뚝을 박고 있나 하는 분을 금할 수 없었다”는 독설로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개는 “지나쳤다”는 반응이었으나 “특이한 성격이 빚은 자기보호 본능”이라고 보는 이도 많았다. 그 뒤로도 네댓 차례 공방이 이어졌으나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60년대 들어 덕성여대 교수로 봉직하다가 62년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장용학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퇴직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언론계에서 일했다. 몇 년 만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그때마다 관심을 모았다. 81년 ‘문예중앙’에 발표한 장편소설 『유역』이 마지막이었지만 99년 78세로 타계한 뒤 미완성 유작 소설 『빙하기행』의 일부가 ‘문학사상’에 발표돼 계속 소설을 써 왔음을 보여주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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