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오얏나무 밑서 갓끈 매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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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전국법원장회의에서 판사들의 신중한 처신을 당부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판사들의 신중한 처신을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최은배(45)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이날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미 FTA가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대법원장의 계속된 경고에도 사법부 내 혼란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양 대법원장은 전국법원장회의 인사말에서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옛말대로 법관은 항상 조심하고 진중한 자세로 자신을 도야(陶冶·소질이나 능력을 계발하는 일)하며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은 법관에게 법률 전문가이기에 앞서 사려 깊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갖춘 원숙한 인격자이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진권 서울고법원장을 비롯한 법원장 31명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토론에서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이슈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판사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문제와 전날 법원 내부통신망에 ‘한·미 FTA 재협상 태스크포스(TF)팀’ 구성을 제안한 김하늘(43) 인천지법 부장판사 글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됐다.

 법원장들은 법원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손상할 수 있다는 데 우려를 표명했다. 일부 참석자들이 “재판과 직접 관련된 구체적 사건이 아니라면 판사 개인의 의견 개진은 허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법원장들은 ‘1인 미디어(media)’로서 SNS가 갖는 파괴력에 대한 우려와 함께 사법부 권한을 넘어서는 견해 표명이나 제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법원장들은 “법관의 의견은 사견(私見)이라 하더라도 사회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클 수 있으므로 발언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이날 회의에서 모아진 의견을 소속 법관들에게 권고하기로 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미 FTA 반대 글을 처음 올렸던 최은배 부장판사는 이날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해당국 정책이나 법으로 인한 재산 피해를 국제기구 중재로 보호받도록 하는 제도)는 우리 법관에게 사법권력을 부여한 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도 주권의 침해 소지가 충분히 있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이정렬(42) 창원지법 부장판사도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ISD 문제는 법률가인 판사들에게는 본연의 업무”라고 말했다.

 한·미 FTA 재협상 청원을 주장했던 김하늘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다시 글을 올려 “대법원장에게 청원문을 제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청원) 제안에 동의한 판사 수가 현재까지 116명이다. 이렇게 빨리 많은 판사들이 공감해 주실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대법원은 김 부장판사의 청원 제안에 대해 사법부 권한 밖의 일이라는 입장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청원을 받아본 뒤 판단할 문제겠지만 한·미 FTA 재협상 TF는 사법부의 권한이 아니고 절차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판사들의 일탈적 행동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모색 중이지만 뾰족한 해법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법원 내에서는 “침묵하는 다수 대신 소수의 판사들이 사법부의 성격을 규정지으려 하는 것이냐”는 불만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관은 검은색과 흰색의 기계적 균형을 맞춰 회색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색투명해야 한다. 법리에 따라 검은색이 되기도 하고 흰색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법관은 색깔을 갖는 순간 생명력을 잃는데, 이미 법원 내부에는 생명력을 잃은 법관들이 적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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