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lobal] GE의 글로벌 인사·인력 담당 부사장 헤더 왕(Heather Wan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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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직장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죠. 안 그래요?”

 유도성 짙은 질문에 그는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자에게 오히려 질문으로 응했다. “설마 양쪽 모두를 100% 잘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발 완벽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세요. 현실적이고 바른 기대수준을 가지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인사·인력개발(HR) 부문을 총괄하는 책임자인 헤더 왕(48) 부사장. GE 근무 경력만 17년, 중국 여성으로는 드물게 3만 명의 직원 가운데 핵심 임원 150명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가 지난달 ‘GE-현대카드/현대캐피탈 우먼스 네트워크(Women’s Network) 콘퍼런스’에서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청중이 모두 빠져나가고 조명도 어두워진 조용한 강당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글=이소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오늘날 요구되는’여성 리더십’은 뭘까.

 “리더십에 있어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없다. 특히 요즘에는 국적을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시대다. 리더는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을 수용하며 ‘협력’을 이끌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을 고무시킬 수 있어야 한다.”

●GE의 리더가 된 비결이 궁금하다.

 “하하. 만약 내가 리더라고 불린다면 그건 회사의 인재양성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GE는 매년 10억 달러를 인재교육에 투자한다. 금융위기 때에도 이 예산은 줄이지 않았다. 회사는 직원을 자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키우기 위해 평가를 한다. 직원이 장·단기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외 근무를 할 수 있는지, 성장을 위해 어떤 교육과 경험이 필요한지 판단해 업무를 배정한다.”

●여성, 남성 차별 없이 기회가 주어지나.

 “당연하다. 18년 전만 해도 중국은 세상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는 나를 글로벌 리더로 키우기 위해 미국에 발령을 냈고, 다시 유럽 근무를 권했다. 지금까지 6개국을 돌았다. 물론 직원이 갈 수 없다고 하면 그것도 존중한다. 성공하는 회사는 자리를 채울 사람이 아니라 재능과 잠재력을 채용한다.”

●해외 경험이 많아 동서양 직원들의 장단점을 잘 알겠다.

 “화법의 차이가 크다. 미국 문화는 직설적이고 간단 명료한 걸 좋아한다. 반면 아시아는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문화다. 한번은 GE의 고위 임원이 아시아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나더니 “불필요한 말 대신 요점을 얘기하는 법을 익히라”고 지적했다. 나중에 그 임원은 그게 아시아 문화란 걸 알고 자기 지적이 잘못됐었다고 말했다.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다. 다만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곳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면 된다.”

●아시아적 특성이 글로벌 리더에 적합한가.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존중과 겸손함은 아주 중요한 리더십 요소다. 직책이 높아질수록 스스로 강한 자아를 갖게 되고 거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겸손하면 비전과 자신감이 없어 보이니 주의해야 한다.(웃음)”

 왕 부사장은 왕성하게 활동하는 직장 여성이자, 중국인 남편과 중학생 딸을 둔 주부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성과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성공한 여성들 뒤에는 반드시 내조자가 있더라. 어떤가.

 “나 역시 부모님과 남편의 도움이 컸다. 딸아이를 낳은 뒤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손주를 돌보기 위해 번갈아가며 미국으로 오셨다. 아시아인들은 미국 체류 비자로 6개월 이상 머무를 수 없었으니까…. 내가 지금은 홍콩에 있지만 남편이 중국에 있기 때문에 홍콩에 살고 계신 양가 부모님께서 여전히 나를 도와주신다. 덕분에 안심하고 해외출장을 다닐 수 있다.”

●남편은 불편해하지 않나.

 “남편이 미국에 가지 말라고 했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내 꿈과 능력을 지지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열린 남자다. 남편은 영화배우이자 감독이다. 나를 따라서 미국 생활을 하느라 좋은 기회들을 많이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기꺼이 내 편을 들어줬다. 너무 고맙다.”

●남편에게 지지를 받는 비결이 있나.

 “누구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면 싫어할 수밖에 없다. 가령 남편은 요리를 좋아하고 설거지는 싫어한다. 그러면 나는 요리준비를 하고 설거지와 뒷정리를 한다. 또 요리에 대한 모든 칭찬은 그에게 돌아가도록 한다. 부부는 서로 격려해야 한다. 내 경우에는 남편이 집안일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한다. 너무 전략적인가?(웃음)”

●딸 얘기를 해보자. 직장맘들은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해 가슴 아파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를 떠올리기가 싫을 정도다. 유치원에서 학부모 참석 행사가 있었는데 내 아이만 부모 없이 갔다. 다른 모든 엄마가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걸 혼자서 지켜봐야 했다. 죄책감이 들어 괴로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죄책감만 느끼고 있어야 하나.

 “내 경우엔 딸에게 왜 엄마가 항상 옆에 있지 못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어른이 됐을 때 남보다 모든 문제를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엄마가 늘 마음만은 함께한다고 말한다. 딸에게 자주 휴대전화로 문자나 e-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때로는 정서적인 보살핌이 물질적인 것보다 의미가 있다.”

●딸은 뭐라고 하나.

 “딸아이의 선생님과 상담을 했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독립적이고 성숙하다고 하시더라.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돌볼 줄 안다고 했다. 선생님이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을 때 매일 자진해서 거동을 도왔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자랑스러웠다. 나는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도 혼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면 된 거다. 학업성적보다 성숙함과 사려 깊음, 배려심이야말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한국 여성은 지금도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그 부분은 개인 기대치의 문제다. 누구도 100% 잘할 수 없다. 80%만큼만 하면 잘한 거다. 부부가 함께 ‘좋은 엄마’ ‘좋은 아내’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면 된다. 부부가 늘 함께 있는데 항상 다툰다면 그게 꼭 좋은 걸까? 더 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선택을 못 하겠다는 건 욕심이 많아서다.”

●그래도 임신과 출산, 육아는 직장여성들에게 힘든 과제다.

 “당연히 그렇다. 만약 임신 때문에 직장에서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자. 내가 내린 결정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가 지났을 때 일에 더 열중하면 된다. 굳이 피해의식으로 가져가지 말자.”

●결혼이 커리어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내 경우 결혼하고 엄마가 된 것이 직장생활에도 도움이 됐다. 남편과 아이는 당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얻는 거다. 가족은 당신의 불평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나 같은 인사담당자는 남편 말고는 속 얘기를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웃음) 또 과거에 감정적이고 아이처럼 행동했던 사람도 엄마가 되면 더욱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된다. 이게 바로 리더십이다. 그러니 결혼하고 싶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그냥 마음을 따르면 된다. 어차피 완벽한 시기와 매뉴얼은 없다.”

●한국에서도 최근 여성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재계 목소리가 높다.

 “당연하다. 19세기는 산업시대였고 최근 20~30년이 IT 시대였다면 다음은 ‘사람의 시대’가 될 거다. 이는 곧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여성은 조직에 다양성을 불어넣는 존재들이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치(value)를 만드는 것이다. 내게 의미 있는 가치란 다른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들이 행복하고 성공하는 걸 보는 게 가장 흐뭇하다. 한국에는 훌륭한 인재가 참 많다. 그 능력을 밖으로 내보이고, 당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가 뭔지 알려야 한다. 여러분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의외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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