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마주치지 않게 화상 증언…성폭력 피해자 법정 악몽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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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때 선생님을 따라간 겁니까?”

 지난 17일 대전지방법원의 한 법정. 피고인 측 변호사가 다그치듯 묻자 A양(17)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1년간 자신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담임 교사의 재판에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참석하겠다고 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A양의 악몽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재판 전엔 복도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과 마주치기까지 했다. A양은 “증언하는 1시간 동안 재판장·검사·변호사 모두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한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며 “재판을 다녀온 뒤에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이 같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성폭력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성낙송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은 24일 “국내 법원 중 처음으로 이르면 다음 달부터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도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성폭행 재판 과정에서 피해 여성이 출석한 뒤 “법정에서 수치심을 느꼈다”며 자살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 수석부장은 “성인 여성뿐만 아니라 아동과 장애인 등 성폭력 피해자들은 법정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수치심과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으로 조사돼 별도 보호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이 도입하는 성폭력 증인 보호 프로그램은 크게 4단계로 나뉜다. 먼저 피해 여성이나 아동을 위해 별도로 증인 대기실에서 성폭력 상담 전문 교육을 받은 ‘증인 후견인(witness guardian)’을 만나게 된다. 증인 후견인은 1시간가량에 걸쳐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게 검사와 변호사·판사가 어떤 질문을 하게 될지 등 재판 절차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된다.

 피해자가 증언 준비를 마치면 가해자와 마주칠 필요가 없게끔 법정이 아닌 화상 신문실로 자리를 옮긴다. 또 피해자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동석하도록 해 불안감을 덜어준다. 증언은 카메라를 통해 법정에 있는 모니터로 전송된다.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도 지원은 이어진다. 법원은 재판 결과가 담긴 판결문을 피고인은 물론 피해자에게도 보내줄 계획이다. 또 피해자들이 원할 경우 가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등 민사소송도 지원하고, 별도 치유를 위해 전문 상담 등도 진행하기로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미 1990년을 전후해 보호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미국은 90년 성폭력 피해 아동의 증언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화상신문을 시작했다. 현재 플로리다주 등 38개 주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은 화상 증언 프로그램인 ‘라이브 링크(live link)’를 89년부터 시행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2003년 성폭력특별법 개정으로 화상증언이 가능해졌지만 이번에 만든 프로그램의 목표는 상담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임상심리전문가인 김태경 백석대 교수는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법원에서 증언하는 성폭력 피해아동과 장애아동에 대해 각 재판부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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