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또 한 편의 영화를 만들다 -〈실제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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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한 '생산력'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마도 김기덕은 현재 활동하는 한국의 영화 감독들 가운데 가장 부지런한 이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경우처럼 거의 1년에 한 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의 영화들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과 주류적 감성과는 가깝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김기덕의 생존력은 놀라운 데가 없지 않다.

최근 개봉한 〈실제 상황〉을 낳은 주요 원동력 역시 김기덕의 '생산에의 집착'에 있는 것 같다. 35mm 카메라 여덟 대와 디지털 카메라 열 대를 동원해 단 3시간 20분만에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다시 말해 김기덕 식의 생산주의의 극단적 표명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건 촬영 현장에 꽤 많은 취재진들을 불러모은 '이벤트' 〈실제 상황〉이 완성된 '영화'로서 실제로 거둔 성취도는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 〈실제 상황〉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 만큼의 '낯설음'을 영화자체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영화적 가공(架空)의 세계를 마련할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리얼리티와 픽션의 상호 넘나듦을 제시하는 것이 〈실제 상황〉이 의도하는 바이겠지만,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그런 컨셉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여기엔 단지 온갖 심리적 억압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한 거리 화가의 답답한 '현실'과 그가 그토록 추한 현실로부터의 폭력적인 탈출을 기도한다는 '백일몽'이, 우리들이 구분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도록 나란히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실제 상황〉의 영어 제목인 'Real Fiction'은 '실제 같은 허구'로 읽히지 않고 '진짜 픽션'으로 이해되고 만다.

〈실제 상황〉의 이런 실패는 빨리 찍기에 대한 고민이 영화 매체와 형식에 대한 자의식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최대 목표가 영화 만들기의 진부한 방식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실제 상황〉이 구축되는 방식은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개인적 원한과 보복의 저열한 이야기는 리얼리티와의 접점을 찾기엔 너무 도식적으로(그러니까 허구적으로) 세워져 있고, 시공간적 현실과 관련을 맺을 수도 있었던 롱 테이크는 엉성한 편집 테크닉에 의해 잠식당한다. 게다가 '상황'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얻고자 이따금 나오는 전형적인 '분위기 음악'은 쓴웃음마저 짓게 만든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지 않은 〈실제 상황〉에 대해 '실험'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사실 한국의 영화 평론가들이나 저널리스트들만큼 실험이란 단어를 과감하게 입에 올리는 이들도 찾기 드물 것이다). 자신들이 정한 교리 안에서 자유를 찾고자 하는 도그마 집단의 행보가 일부로부터 호의를 끌어내는 것은 (센세이셔널리즘의 혐의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게임의 규칙'에는 불편한 현실을 돌파하고자 하는 일말의 '진정성'이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 같은 이가 그들의 도발적인 메니페스토(선언)에 걸맞은 걸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터이다. 반면 김기덕은 스스로 세운 게임의 룰 안에 충실히 머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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