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재의 불안, 박태환의 좌절 이기게 한 건 ‘마음 치료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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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체조 요정’ 손연재(17·세종고·사진)는 지난 9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열린 세계리듬체조선수권대회 결선 날,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 대회엔 내년 런던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만큼 부담도 컸다. ‘이래서 경기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경기장에 나타난 손연재의 모습은 자신감이 넘쳤다. 빨간 리본을 들고 경쾌한 어깻짓으로 걸어 나오는 그에게 조금 전까지 다리를 덜덜 떨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실수도 없었다. 전광판엔 예선(26.800점)보다 높은 26.900점이 찍혔다. 거짓말 같은 반전이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클린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흔들릴 때 옆에서 누군가가 중심을 잡아 줬기 때문이다.

스포츠심리학자 조수경 박사가 그 역할을 했다. 지난여름부터 손연재의 심리상담을 맡아 온 그는 이번 대회에 동행해 손연재 옆을 떠나지 않고 그와 대화를 나눴다. 중요한 것은 ‘단방향’이 아닌 ‘쌍방향’. 상담사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게 아니라 선수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주는 것이다. 손연재 역시 “경기하면서 짜증 났던 부분이나 느낀 것들을 얘기하면 박사님께서 잘 들어주신다. 표현을 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손연재의 심리상담 목표는 ‘행복한 리듬체조 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등수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이 준비한 바를 충분히 발휘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부담에서 벗어나야 더 좋은 성과도 낼 수 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연기를 즐긴 손연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1위를 차지해 15위까지 주어지는 런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환(22·단국대)은 이듬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전 종목에서 예선 탈락했다. 이후 각종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박태환은 끝났다’는 얘기도 나왔다. 20대 초반인 박태환이 감당하기엔 가혹한 반응이었다. 박태환은 실제로 수영을 그만두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박태환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3관왕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선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과정에서도 심리치료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 손연재에 앞서 조 박사를 만난 박태환은 그간 꽁꽁 감춰 뒀던 속내를 털어놨다. 처음엔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각종 수치가 꾸준히 상승했다. 목표 역시 ‘금메달’이 아닌 ‘좋은 기록’으로 잡았다. 부담을 떨치고 합리적인 목표를 향해 정진한 결과 박태환은 올림픽 2연패를 바라보게 됐다.

이처럼 심리학은 경쟁·긴장·성적에 짓눌리는 스포츠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체력·영양·부상치료 등 눈에 보이는 분야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등 단체 구기종목에서도 심리치료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프로야구 삼성은 13년째 꾸준히 선수들의 심리상담을 해 왔으며 LG·두산·넥센도 심리 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한화도 심리 트레이너를 찾고 있다. 프로축구 수원은 올여름 심리치료를 받은 뒤 하위권이던 K-리그 성적이 수직 상승해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수요가 늘다 보니 대학에서 스포츠심리학과가 속속 개설되고 심리상담·심리치료 등을 전담할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심리 프로그램이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여 주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체대 윤영길(스포츠심리학) 교수는 “스포츠심리학은 10명의 선수를 키워 내기보다는 한 명의 선수가 10년 이상 뛰어난 실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몇몇 개인이나 구단에서 심리 트레이너를 활용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피지컬 트레이너나 팀 닥터처럼 심리 담당이 스포츠팀의 필수 요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애성 기자 iver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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