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 - 조 디마지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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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팬들은 조 디마지오의 통산 홈런이나 안타 수가 역대 선수 중 최상위권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를 '팀의 명성에 편승하여 과대평가된 선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수를 평가할 때에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들은 결코 그와 같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더 양키 클리퍼(The Yankee Clipper)'는 야구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선수 중 하나였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프로 근성의 1인자였으며, 천부적인 재능에만 의존하지 않고 항상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선수이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당대 최고의 강타자였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놀라운 수비력을 가진 중견수이기도 하였다. 양키 스타디움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디마지오가 활약하던 당시에는 중견수가 커버해야 하는 범위가 극히 넓은 구장이었다.

그러나 디마지오는 수비시 코칭 스태프에게 불안감을 던져 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만약 골든 글러브 상이 당시에도 존재했더라면, 그의 다재다능함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또한 디마지오는 누상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주자였다. 팀 감독이었던 조 매카시가 그를 가리켜 '내가 본 선수 중 최고의 주루 플레이를 하는 선수'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선수로서 그는 어떠한 면에서도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디마지오는 1914년 11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어촌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 그는 최고의 영웅으로 불린다. 일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그의 이름인 '조지프 폴 디마지오'를 이탈리아식으로 '주세페 파올로 디마조'로 부르기도 한다.

디마지오는 1933년 마이너 리그인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샌프란시스코 실스에 입단함으로써 프로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 해에 6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수립하여 전국의 팬들을 놀라게 했고, 메이저 리그의 스카우트들은 그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그는 무릎 부상을 당하였고, 이로 인해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뉴욕 양키스가 결국 이 해 말에 실스에서 1년간 더 뛰게 하는 조건으로 디마지오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디마지오는 1935년 실스에서 0.398를 기록하여 양키스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였다

1936년 시즌 초반에 디마지오는 다시 부상을 당하였으나 곧 회복되었다. 이 해에 그는 15개의 3루타로 이 부문 1위에 올랐고, 0.323의 타율과 29홈런, 126타점이라는 호성적을 올렸다. 이 해에 그가 기록한 3루타 수와 득점(132)은 AL 신인 최고 기록이었다.

1937년 그는 AL 홈런 부문에서 46개로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동시에 장타율(0.673)과 득점(151)수위에 올랐다. 이는 양키스 홈 구장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극히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당시 양키 스타디움은 우타자가 홈런을 뽑기는 매우 힘든 구장이었다. 양키스가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활약하던 시절에, 이 두 좌타자가 좀더 많은 홈런을 뽑게 하기 위해 구장의 우측 펜스를 앞당기는 대신 좌중간 펜스를 상당히 타석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70년대에 개축을 거친 이후 양측 펜스의 형태는 다소 균형이 잡혔지만, 디마지오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양키스의 우타자가 홈런왕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마지오는 이와 같은 관념을 일거에 뒤집었다.

2년 후인 1939년, 그는 처음으로 리그 MVP에 올랐다. 그는 9월초까지 4할을 훨씬 넘는 타율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시력에 이상이 오는 바람에 0.381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1941년 디마지오는 야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록 중 하나를 작성하였다. 5월 15일에 시작된 그의 연속 경기 안타 행진은 그칠 줄 몰랐다. 6월 21일 그는 20년대의 전설적 2루수 로저스 혼스비의 기록(33경기)을 경신하였고, 이어 29일 4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워 조지 시슬러와 함께 20세기 통산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이어 7월 2일, 그는 보스턴 레드 삭스를 상대로 기록을 45경기로 늘리며 1897년 위 윌리 킬러가 세운 메이저 리그 통산 최다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깨뜨렸다.

이 기록은 7월 1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3루수 켄 켈트너의 호수비에 막혀 56경기만에 끝났으나, 그는 그 다음 경기부터 새로 안타 행진을 시작하여 또다시 17경기에서 연속으로 안타를 날렸다.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앞으로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해에 그는 리그 타점왕까지 차지했으며, 0.406의 타율을 기록하여 최후의 4할 타자가 된 테드 윌리엄스를 제치고 리그 MVP에 또다시 등극하였다.

1942년 시즌을 마친 뒤 디마지오는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뒤 맞은 첫 시즌인 1946년에 그는 0.290의 타율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고, 이 시즌이 끝난 뒤 양키스는 그를 보스턴 레드 삭스의 테드 윌리엄스와 트레이드시킬 것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7년,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타율 0.315에 20홈런, 97타점을 기록한 그는 생애 3번째로 리그 MVP가 되었다. 1948년에도 그는 여전한 모습을 보였고, AL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었다.

또한 1947년에 그는 단 한 개만의 에러를 범했을 뿐, 완벽에 가까운 수비력을 보였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49년 최초로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1949년 그는 심각한 오른쪽 발목 부상을 당했으며, 그 때문에 이 해에 그는 단 76경기에만 출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혼을 발휘하여 이 해와 이듬해에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1951년을 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영웅은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디마지오의 통산 기록은 타율 0.325와 361홈런, 1537타점 등이다. 그는 1955년 예상대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인 1954년 1월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여배우 노마 진 베이커(마릴린 먼로)와 결혼하여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보수적이고 점잖은 성격의 디마지오가 최고의 섹스 심벌과 결혼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디마지오와 먼로는 결국 이 해 가을에 갈라섰다. 그러나 디마지오는 먼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1962년 먼로가 사망한 뒤 매년 무덤에 헌화하기도 했다.

노년기에 폐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디마지오는 결국 1999년 봄에 플로리다 주 헐리우드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를 사랑하던 전 미국의 야구 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야구 역사뿐만 아니라 소설 '노인과 바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로빈슨 부인'등을 통해서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

- 1914년 11월 25일 캘리포니아주 마르티네스 출생
- 1999년 3월 8일 사망
- 1936년~1951년 뉴욕 양키스 외야수
- 우투우타
- 통산 타율.325 2214안타 361홈런 1537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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