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0) 명감독의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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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TBC 드라마 ‘하얀 장미’에 출연한 문숙.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중앙포토]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을 한 이만희 감독과 배우 문숙의 이야기다. 1974년 황석영 원작의 ‘삼포 가는 길’에서 이만희 감독과 다시 한 번 뭉치려던 계획은 틀어졌다. 나는 그 해 ‘별들의 고향’ ‘13세 소년’ 등 무려 19편의 주연을 맡았고, ‘그건 너’의 메가폰도 잡았다. 이 감독은 나 대신 김진규를 출연시켰다. 백일섭·문숙과 함께 그 해 여름 ‘삼포 가는 길’ 촬영에 들어갔다.

 ‘삼포 가는 길’은 다음 해 봄까지 거의 1년에 걸쳐 촬영했다. 그 과정에서 이 감독의 건강이 결정적으로 악화됐다. 두 주연인 김진규와 백일섭, 모두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이 감독은 촬영 후 밤마다 이들과 어울려 말술을 마셨다. 내가 현장에 있었다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만희 감독

 젊은 여배우 문숙을 데려간 것도 그의 건강에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문숙은 이 감독이 73년 ‘태양 닮은 소녀’에서 데뷔시킨 신인배우였고, 두 사람은 그 작품을 통해 연인이 됐다. 나는 ‘태양 닮은 소녀’의 주연이기에 문숙을 잘 알았다.

 문숙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문희나 안인숙보다 몸이 작았다. 한국 최고 감독의 생활은 눈물 겹도록 비참했다. 빈털터리인 이 감독은 집도 없이, 서울 충무로5가 인현동의 한 삼류여관에서 문숙과 동거했다. 20대 초반의 문숙과 이 감독의 나이 차이는 23살이다.

 이 감독은 75년 봄 ‘삼포 가는 길’을 편집하던 중 충무로 중앙대 성심병원으로 실려갔다. 병실로 달려갔을 때, 이 감독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간암 말기였다. 고통에 시달린 이 감독은 지인들에게 소위 ‘피주사’라고 하는 알부민 주사를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알부민은 미8군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주사 후 2시간 정도만 컨디션이 회복됐다. 주사가 반복될수록 효과는 급격히 떨어졌다.

 이 감독은 75년 4월 13일 입원 열흘 만에 세상을 떴다. 마땅한 장례식장도 없어, 충무로에서 영화인장으로 노제(路祭)를 지냈다. 극동영화사 앞 골목에 모여든 70~80명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내 대여섯 번째 옆에 이 감독이 평소 즐겨 입던 검은색 몽탁을 걸친 여인이 서있었다. 문숙이었다. 기자들이 그 자리에 여럿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감독의 몽탁이 그녀의 몸에 비해 컸기 때문에 소매를 걷고 있었다. 내가 본 문숙의 마지막 모습이다.

 평소 이 감독을 따르던 배우 이해룡이 먼 발치에 서있는 문숙을 장지에 데려갔다. 이해룡은 유족들에게 “당신들도 슬프지만 가장 슬퍼하는 여인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사시켜야 한다”면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 감독 무덤에 절하며 눈물을 흘렸다. ‘삼포 가는 길’은 이 감독 타계 한 달 후 극장에 걸렸다.

 문숙은 그 후 은막을 떠나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해 TV에서 하와이에 살고 있다는 문숙의 모습을 잠깐 보았다. 그녀는 몇 년 전 자서전을 통해 이 감독과의 사랑을 고백했고, 이 감독의 딸 이혜영과도 만났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같은 그들이다. 비운의 여인이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이 감독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참으로 묘하고, 위대하고, 아름답다. 사랑만큼 절실한 건 이 세상에 없다. 나는 단언한다, 이 감독은 행복한 남자였노라고.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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