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섹스광 → 순진한 희생양 … 영화같은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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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이던 어맨다 녹스가 지난 3일 이탈리아 페루자 항소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페루자 로이터=뉴시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탈리아 교환학생 살인 사건’이 항소심에서 극적 반전을 이뤘다. 이탈리아 페루자 항소법원은 3일(현지시간) 살인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미국인 어맨다 녹스(24·여)와 이탈리아인 라파엘 솔레시토(27)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녹스와 솔레시토는 1심에서 각각 징역 26년, 25년 형을 선고받고 4년 넘게 복역 중이었다. 이들은 판결 직후 석방됐다. 2007년 11월 2일 페루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미국에서 영화(‘어맨다 녹스-머더 온 트라이얼’)로 만들어져 올해 초 개봉되기도 했다.

영국 리즈대를 다니다 페루자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영국인 여대생 머레디스 커처(당시 21세)가 방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커처가 살던 집을 함께 임차한 녹스를 포함한 6명이 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올랐다. 미국 시애틀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녹스는 최초 진술에서 인근 술집 주인 패트릭 루뭄바가 커처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뭄바는 사건 발생 추정 시간에 자신의 술집에 있었던 것으로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가 입증됐다. 수사관이 거짓 진술에 대해 추궁하자 녹스는 밤새 남자 친구인 솔레시토의 집에 머물며 함께 컴퓨터로 영화를 봤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컴퓨터 전문가의 조사에서 사건 당일 솔레시토의 컴퓨터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 검찰은 녹스와 솔레시토, 그리고 이들과 평소에 어울려온 코트디부아르 출신 루디 궤데(24)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솔레시토의 집에 있던 부엌칼의 손잡이에서 녹스와 솔레시토의 지문이 발견되고 칼날에서는 커처의 유전자(DNA)가 검출됐다는 것이었다. 커처의 방에서 발견된 브래지어 훅에서 솔레시토의 DNA가 나왔다는 것도 증거에 포함됐다. 궤데는 발자국 등으로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검찰은 처음에는 이들이 커처와 함께 사이비 종교 의식을 치르다 살인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 뒤 마리화나 환각 상태에서 섹스 게임을 하다 시비가 붙은 것으로 판단했다가, 단순히 금전적 동기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을 바꿨다. 항소심에서 배심원들은 “칼날에서 발견된 유전자의 양이 적어 커처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브래지어 훅은 증거 수집 과정에서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검식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녹스와 솔레시토의 손을 들어줬다. 부엌칼이 커처의 목에 난 상처를 내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도 녹스 측 변호인이 배심원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 녹스는 판결 직전에 “나는 커처를 죽이지 않았다. 내 인생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궤데는 이미 항소 절차를 모두 거쳐 16년 형이 확정된 상태다.

 이탈리아 검찰은 상고를 검토 중이다. 출중한 외모 때문에 국제적 관심을 끌어온 녹스는 곧 시애틀로 돌아갈 계획이다. 외신들은 미국 방송사들이 그에게 100만 달러(약 12억원)를 단독 인터뷰 사례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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