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테헤란 밸리 ‘怪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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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벤처기업의 요람 ‘태헤란 밸리’가 심상치 않다. 미 나스닥시장이 맥을 못추면서 인터넷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는 가운데 국내 벤처기업계에도 거품론이 확산되고 있다.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자금난에 시달리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고 벤처기업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인력이 대기업으로 다시 돌아가는 U턴현상도 나타난다.

업계에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란 벤처기업 성격상 업종별로 상위 1·2위만 살아 남고 나머지는 머지 않아 정리 내지 흡수·합병될 것이라는 ‘괴담’들도 나돌고 있다.

인터넷 비즈니스에 대한 ‘거품론’이 일면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터넷관련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러시가 주춤하고 있다는 것.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경색으로 자금난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창투사들은 제조업에 수반되지 않은 인터넷업체 등에는 아예 투자하지 않겠다는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국내외 인터넷 비즈니스 동향을 면밀하게 검토해 당분간 가급적 신중한 자세를 취한다는 게 창투업계의 일반적 동향이다. 산은캐피탈의 경우 수십개 인터넷업체에 대한 평가를 마친 상태이지만 최종 투자결정을 미루고 있다.

3∼4개 투자대상 업체를 선정해 놓고 최종 결정을 유보한 산은캐피탈 서초지점 전호석 팀장은 “거품론에 이어 태헤란 밸리 대란설 등 머지 않아 실적이 미미한 벤처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인수·합병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섣불리 투자하기보다 좀더 상황을 지켜 보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한미창업투자의 이영민 수석심사역도 “요즘 업계에선 최종적인 투자가격 협상이 결렬돼 투자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묻지마 투자’등 벤처투자열풍이 한창일 때처럼 부풀려진 높은 주당 투자가격을 이제 벤처캐피털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만계 벤처캐피털인 CDIB&MBS의 김형근 투자담당 이사는 “투자 단가가 너무 높아 코스닥에 등록돼도 큰 수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하는 곳이 늘고 있다”며 “따라서 공개가 임박한 성숙단계의 기업에 무리하게 투자하기보다는 기술력을 갖춘 초기 벤처기업들을 발굴하는데 역점을 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벤처기업으로 몰리던 인재들도 요즘은 대기업쪽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벤처로 떠났던 인력이 재입사하고, 대학졸업 후 벤처에서만 일하던 20대 후반의 젊은 층도 대기업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현대·삼성·SK·LG 등 대기업들도 홈페이지를 통한 수시채용 규모를 늘리거나 인터넷사업에 적합한 우수인력을 끌어오는 임직원에게 포상키로 하는 등 ‘벤처인력’잡기에 나섰다. 주요 그룹 인사 담당자들은 “벤처기업에 우수인력을 빼앗겨 온 대기업들이 이제는 자체 인터넷사업을 위해 유능한 벤처 경험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고 입을 모은다. 일부 대기업들은 ‘제발로 걸어나간 사람은 받지 않는다’는 오랜 인사관행을 깨면서 벤처로 갔던 인력을 재입사기키고 있다. 물산·전자 등 삼성그룹의 주요 관계사에 지난해 10월 이후 입사지원서를 낸 경력직 1만5천여명 중 8%인 1천2백명이 벤처출신으로 파악됐으며 이 가운데 2백40명은 채용을 위한 최종 면접을 마쳤으며 대부분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층이다.

올들어 SK(주)
는 60명, SK상사는 3백명의 경력직을 채용했는데 중견소프트웨어업체 출신 인력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고 회사측은 전했다. 현대·LG 등도 최근 수시채용을 늘린 결과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이 다수 지원했다.

현대증권의 경우 지난달 정보통신·인터넷·생명공학분야에서 2년 이상 일한 사람을 벤처기업 투자를 위한 심사분석 담당으로 채용하겠다는 공고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우자 벤처출신들이 적잖게 몰렸다.

삼성구조조정본부 인사팀 관계자는 “인터넷사업 확대에 필요한 인력을 기왕이면 벤처기업에서 일한 사람들로 충원하는 게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데다 경직된 대기업문화를 바꾸는데도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벤처인력의 대기업으로의 역(逆)
이동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벤처기업에서 삼성관계사로 옮긴 김모씨(29)
는 “벤처를 통해 고소득을 올리겠다는 꿈이 최근 들어 불확실해졌고 업무 인프라와 자기계발 프로그램이 잘된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삼성이 벤처기업 경력자의 채용면접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스톡옵션의 성패가 불확실한데다 당장 월급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고 ▶툭하면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등 격무와 스트레스로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어렵다는 등의 애로사항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벤처거품론이 걷히기 전까지 이런 역류현상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新경제를 주도할 벤처기업 육성의 필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면서 “건전기업은 육성하는 동시에 거품을 제거하기 위한 엄격한 상장·등록제도 등을 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기수 기자 <이코노미스트 제5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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