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자유 찾았던 양승태 “무거운 짐 지고 가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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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된 양승태 전 대법관이 2010년 2월 강원도 화악산으로 간 1박 2일 야영산행에서 고기를 굽고 있다. 양 전 대법관은 법원산악회장을 역임한 등산 매니어다. [월간 산 제공]

양승태(63·사법시험 12회) 대법원장 후보자는 19일 오전 9시30분쯤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이용훈(68·고시 15회) 대법원장을 만나는 것으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양 후보자는 이 자리에서 “고뇌 끝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취지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이 대법원장은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았지만 잘 하시리라 믿는다”고 덕담을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양 후보자는 박일환(60·15회) 법원행정처장도 만났다. 박 처장은 강력한 대법원장 경쟁 후보 중 한 명이었으나 현 정부에서 정부 요직에 많이 기용된 TK(대구·경북)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고배를 마셨다는 분석이다. 두 시간여 동안 청사에 머물던 양 후보자는 11시 30분쯤 대법원을 떠났다.

 법원 내에서 양 후보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통한다. 판결에 있어선 보수성향이지만 사생활은 철저히 자유인을 지향한 것이다.

 지난 2월 대법관 퇴임 전에 “대법관 6년은 징역살이나 마찬가지로 힘들었는데 내가 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대법원장을 하겠느냐. 대법원장은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라고 후배 법관들에게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한다. 퇴임 직후 “앞으로 남은 인생 중 최소 10년은 좋아하는 걸 하며 살겠다”며 네팔의 히말라야로 떠났다. 양 후보자는 등산 매니어다. 법원산악회장을 오래 했고 대전의 특허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후배 법관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다. 대법관 퇴임 후 마나술루와 안나푸르나를 등반하고 까맣게 탄 얼굴로 40여 일 만에 귀국한 그는 6월 초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한 달 뒤 대법원장 인사 검증에 들어간 청와대 측이 ‘자기검증 설문서’를 제출해 달라고 하자 양 후보자는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이 없다”고 밝힌 뒤 이후 연락을 끊었다. 그러곤 8월 6일부터 20여 일 일정으로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내 360km 구간을 도는 ‘존 뮤어’ 트레킹에 돌입했다. 이미 6개월 전 입산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법원행정처의 한 판사는 “존 뮤어 트레킹 코스에는 보급소가 한 군데밖에 없어 각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갈 수밖에 없다”며 “기독교인인 양 후보자 입장에선 마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예수님의 심정으로 걷고 또 걸었던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양 후보자는 등산할 때 항상 후배들을 먼저 챙기는 섬김의 리더십과 자기 희생 정신을 보여줬다”며 “그런 점들이 대법원장 0순위로 꼽힌 이유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막판까지 고사했던 또 다른 이유로 1993년 사별한 전 부인에 대해 미안함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 인사 검증 준비팀의 한 관계자는 “2005년 대법관 청문회 과정에서 경기도 안성의 농지를 불법 매입한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며 “이는 당시로서는 위법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사실 사별한 전 부인이 판사 월급이 박봉인 데다 전근이 잦아 생활유지 차원에서 사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양 후보자는 또다시 그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을 매우 불쾌해 했던 걸로 안다”고 말했다. 양 후보자의 둘째 딸은 노무현 정부 때 법무부 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변호사의 셋째 아들과 부부 사이다. 김 변호사는 19일 “양 후보자가 미국에 있을 때 전화를 걸어 ‘관직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더라. 운명적인 게 있으니까 마음을 좀 넓게 갖고 생각해 보라’고 조언해 준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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