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기억하려 작별 선택했다, 내게 시란 그런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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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인 박형준(45·사진)씨가 6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제목부터 절절하지만 시집 뒷표지, 시인의 말이 심상치 않다.

 “난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신과 만나지 않고, 당신과 숱하게 만나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잊혀진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작별을 선택한 사람이다. 내게 시는 그런 것이다.”

 첫 사랑이 기억 속에서 더 온전하고 견고한 것처럼 자신의 시는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끊는 역설적인 생각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표제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사랑을 사과나무 꼭대기에 어느날 맺힌 작은 열매로 비유한 아름다운 시다. 열매가 떨어져 사랑이 끝장난 후 시의 화자는 사과나무의 꼭대기가 생각날 때마다 운다. 하지만 여기서 작은 사과 열매를 반드시 남녀간의 사랑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중한 것 무엇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시집을 통틀어 나타나는 두드러진 사랑의 대상은 정확히 6년 전 네 번째 시집을 낼 무렵 돌아가신 시인의 아버지다. 박씨는 장례식장에서 새 시집을 받아봤다고 한다. 따끈따끈한 시집 사이에 저승길 가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끼워 하관할 때 함께 묻었다. 이런 사연이 두 번째로 실린 시 ‘시집’에 고스란히 밝혀져 있다.

 첫 머리에 실린 시 ‘황혼’은 산소가에서 맞은 저물녘 하늘을 호롱불 배어나오는 창호지로 비유한 고즈넉한 작품이다.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창호지 않쪽에 배어든/호롱불//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이런 아버지를 기리는 시들을 ‘1부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에 모았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울컥할 수 있다. 그만큼 구슬픈 추모시가 많다.

 박씨는 “이번 시집을 내는 데 뮤즈(시의 여신) 역할을 한 이는 아버지”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시를 쓰다가 다른 시도 많이 쓰였다”는 것이다. 근래 보기 드문 사부곡(思父曲)이 아닐 수 없다.

 물론 2·3부의 색깔은 좀 다르다. 박씨는 “시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시, 일상에서 마주치는 쓸쓸한 존재들에 대한 시를 모았다”고 했다.

 3부에 실린 ‘불꽃’은 단단하면서 감동적이다. 전문이다. ‘역 광장에 시위가 한창인데 바리케이드 한쪽에서 노인이 신문지를 수의처럼 덮고 잠들어 있다 노숙견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와 수의 바깥으로 삐져나온 노인의 손을 핥는다 노인의 깊게 파인 손등에 내리쬐는 저 불꽃이야말로 세계와 삶에 대한 고요한 항의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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