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광개토대왕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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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일제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 중 하나가 『삼국사기』 앞부분은 김부식(金富軾)이 창작한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1913년에 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비판(三國史記 高句麗紀の批判』에서 “역사적 사실로서는 궁(宮:태조왕) 이전의 국왕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태조왕 이전의 기록을 모두 부인했다.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결정적으로 부인하는 물증이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王陵碑)’다.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하는데 김부식(1075∼1151)이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이 비를 보지 못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계부 황제묘(皇帝墓)조에 “세상에서 전해 내려온 말로는 금(金) 나라 황제묘라 한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요(遼)·금(金) 황제릉으로 알고 있었다. 비문의 첫 부분은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하신 터전이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라고 시작하는데, 추모왕이 부여를 떠나 남하하는 도중 엄리대수란 강이 앞을 가로막자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라고 명해 갈대와 거북이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를 보지 못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조에 이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규보는 26세 때인 명종 23년(1193) 4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보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쓰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그의 『동명왕편』에도 이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김부식이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가졌더라도 ‘천제의 자손, 하백(물의 신)의 외손’이나 ‘갈대와 거북으로 만든 다리’ 같은 이야기는 절대로 창작할 수 없다. 이규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이 능비를 보지 못했음에도 그 내용이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은 『구삼국사』처럼 고려 때까지 전해졌던 고구려 건국 사료를 보고 썼다는 뜻이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神異)한 사적에 대해 어리석은 남녀들(愚夫騃婦)도 자못 능히 말한다’고 전하고 있다. 만주 집안(集安)에 다시 가서 호태왕비를 대하니 아직도 식민사학의 미망(迷妄)에 빠져 자신을 부정하는 후손들의 무지함을 그 거대한 비신(碑身)으로 꾸짖는 듯 우뚝하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