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현욱의 과학 산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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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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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

인간의 가장 오래된 친구로 꼽히는 박테리아, 즉 세균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다. 약 5만4000년 전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도처로 퍼져나갈 당시에도 위장 속에 거주했다는 증거가 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개발도상국 성인의 80% 이상이 보균자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 균이 위에 염증, 궤양, 암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함께 살아온 역사가 오랜 미생물은 숙주와 상호 적응해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장균이 섬유질을 분해하고 몇몇 비타민을 생산하면서 장내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 대표적 예다. 유독 헬리코박터만 해로운 병원균 행세를 할 이유가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개인의 체질과 환경에 따라 해로울 수도,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대 의대의 마틴 블레이저 박사는 ‘숙주와의 공생’ 이론을 펴고 있는 대표적 학자다. 그는 “지난 몇십 년간 위생이 개선되고 항생제가 남용되면서 특히 선진국의 헬리코박터 보균율이 크게 낮아졌다”면서 “선진국에서 소화성 궤양과 위암이 줄어든 대신, 역류성 식도염과 특히 치명적인 유형의 식도암이 크게 늘어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헬리코박터는 “수만 년 이상 인간의 위장에서 주류를 차지하면서 살아온 세균”인데 “이런 세균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어린이의 비만과 당뇨병 등이 크게 늘고 있는 것도 소아(小兒)의 헬리코박터 보균율이 10% 미만인 사실과 연관된다고 한다. 헬리코박터는 위에서 분비되는 식욕 관련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 균을 제거하면 과식, 따라서 비만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는 또한 “보균자에게는 면역반응을 조절하는 특정 T세포의 양이 더 많다”면서 “그 덕분에 소아 천식, 알레르기성 비염, 피부 알레르기를 앓는 일이 비보균자보다 적다”고 설명한다.

 마침 헬리코박터가 알레르기성 천식을 억제한다는 논문이 ‘임상조사 저널’ 최근호에 실렸다. 생후 며칠 내에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생쥐는 그렇지 않은 생쥐와 달리 강력한 천식 항원에도 저항력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항생제로 이 균을 제거하면 천식 저항력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앞서 지난 5월엔 위암 수술을 받은 보균자들의 10년 생존율이 비보균자의 3배 이상에 이른다는 논문도 ‘국제 암저널’에 발표됐었다. 헬리코박터 입장에서 보면 ‘해로운 병원균’이라는 오명을 벗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셈이다.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콘텐츠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