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철의 ‘부자는 다르다’] 참부자는 남들이 이름 내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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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부자학연구학회 회장


물질만능주의가 사회에 만연하면서 거의 모든 행사나 활동에 부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또한 부자와 이래저래 얽히는 사람들도 부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친분을 과시합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스스로 이름을 날리려 애를 씁니다. 공명심.

 하지만 참부자들은 그런 공명(功名)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부자한테서 감복받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절로 널리 퍼져 나갔을 뿐이지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를 강하게 가진 사람들은 도토리 부자일 뿐입니다. 명함 앞뒤에 박힌 수십 개의 직함, 사무실에 널려 있는 무수한 상패와 표창장, 수십 개 단체의 임원직들….

 올바른 부자 문화가 왜 중요한지 설명하기 위해 필자가 만든 개념이 ‘공명 함정(Name Trap)’입니다.

 인간의 하위 욕구가 물질과 성이라면, 상위 욕구는 이름과 지식입니다. 거짓 이름을 날리려는 부자들과 부자들의 돈을 노리는 사기꾼 부류들이 있습니다. 내심으로는 하고 싶지 않으나 사회적 양명을 위해 포장기부를 하는 부자들이 만든 재단도 많습니다. 세금을 피하려 만든 재단을 친인척들이 관리하면서 세상에다가 ‘나 좋은 일 했소’ 하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기부를 구걸하는 위선 사회단체들도 즐비합니다. 돈 내는 부자들에게는 굽실거리면서, 실제로 낸 것보다 더 큰 액수의 영수증을 남발하면서 ‘기부 장사’를 하는 위장 사회조직들은 실제로는 영리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차에서 턱 괴고, 서민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자기 욕구를 채우는 사회봉사단체장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푼돈 던져 주면서 ‘이름을 얻는’ 짓은 도토리 부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기부를 조금 하면 온갖 사회단체의 행사에서 맨 앞줄에 세웁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행사들에는 항상 돈 많고, 폼 잡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나섭니다. 입으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공명심·이득·흑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행사의 식순 앞자리를 구걸하는 부류들이 올바른 부자화 사회(affluentization society)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불쌍한 사람들과 사회 약자들을 위한다면 행사의 대부분에 노약자·장애인·취약계층이 나서야 하고 실제로 돈 낸 사람들 혹은 높은 사람들은 앞에 나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한 진짜 부자사회가 되려면 ‘기부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부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고 순수한 뜻이라고 판단될 때만 기부를 하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게 참다운 일입니다.

 부자가 되는 과정은 이기심이 작동하고, 부자로 사는 과정은 이타심에 근거해 살아야 합니다. 자신과 가문의 이름을 스스로 내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남모르게 해 남들이 이름을 알아줘야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그룹의 회장이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기부약정을 했고 생전에 일부를 냈습니다. 작고한 이후 그 고등학교에서 나머지 약정액을 기부해 달라고 하자 새로 회장이 된 아들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있던 이름도 잊어버린 후대입니다.

 반대로 어느 중견기업체의 창업주는 생전에 거액을 모 재단에 약정했는데 그 회장 사후에 실제로 자녀들이 인감도장과 문서를 들고 와서 그 재단이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개인 돈으로 기부를 해야지, 회사 돈으로 기부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느 중견기업체 오너가 필자와 둘이 점심식사를 할 때 한 말입니다. 작고하신 어느 그룹 창업주는 생전에 “해외 유학 간 학생들에게 사비로 장학금을 주고 있노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게 진짜입니다.

 이기심으로 내는 돈은 금방 잊혀지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름은 아주 오래갑니다. 주가 조작으로 부를 쌓은 미국 밴더빌트 가문은 대학을 세워 양명했고, 자기가문 출신 교황의 지원으로 거부가 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소장한 예술품을 모두 기증해 이름을 올렸습니다.

 위선에서 자선으로, 얻으려 노력하는 이름에서 남이 인정해 주어지는 이름으로, 부자가 세상을 뜨자마자 손가락질 받는 이름에서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름으로 세상에 각인되는 부자 가문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아버님이 새벽에 도자기를 다듬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좋아하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땅 팔아서 산다고 미친 사람이라고 동네에서 쑥덕거렸는데.” 조선반도에 오로지 10여 명에 불과했던 거부들 중의 한 분이 집안의 무수한 땅을 팔아 우리 문화 유산인 도자기를 사들였습니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아직도 매년 사람들이 찾는 명문가의 장자가 필자에게 한 말씀입니다. 이름은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내어주는 게 진짜입니다.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부자학연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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