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49) 심장마비 1분 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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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주연의 영화 ‘보고 싶은 얼굴.’(1964) 신성일은 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부산 송정리 해수욕장에서 촬영한 ‘목마른 나무들’에서 수영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상대방 행동의 밑바닥에 깔린 마음을 읽어내는 눈썰미는 세상살이에 큰 도움을 준다. 주먹도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1964년 여름 ‘잃어버린 태양’과 ‘목마른 나무들’ 촬영 중 주먹들과 시비가 붙은 탓에 나는 잠시 제주도로 피신했다. 그 동안 매니저가 사태를 수습했다.

 복귀 후 첫 촬영지는 부산 송정리 해수욕장. 엄앵란과 ‘목마른 나무들’의 해변 데이트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해변에 도착하니 갈증도 나고, 너무 더웠다. 나는 해변에 파라솔을 꽂자마자 그 아래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영덕 바닷가에서 수영으로 단련된 몸이다.

 100m쯤 헤엄쳐 갔을까. 갑자기 근육경련이 일어났다. 몸이 뻣뻣해졌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럴 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해야 한다. 그러나 물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익사하거나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일단 배와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물에 둥둥 떠있었다.

 그때 나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부산 영도다리를 장악하고 있는 안태섭이었다. 그 일당은 매년 여름 해수욕장에 진을 치고 자릿세를 받았다. 송정리는 교통이 불편해 치외법권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물에 둥둥 뜬 채 움직이지 못하는 날 보고는 사태를 파악했다. “가봐라. 저 놈 사고 났다”며 부하 둘을 보냈다. 그들에게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근육경련이 발생한 곳은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따뜻한 물에서 수영하다가 갑자기 찬 물속으로 들어가니 사고가 날 수밖에. 준비 체조도 없이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 안태섭이 “술 한 잔 하자”며 찾아왔다. 술 자리는 사양하고 대신 술값을 두둑하게 주었다. 그는 나와 안면을 튼 후 부산에서 사고가 나면 이태원 우리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훗날 주먹 생활을 청산하고 유명한 가요계 매니저가 됐다.

 김정명이라는 주먹도 알게 됐다. 사고를 치고 내게 달려왔길래 제주도로 보냈다. 안태섭과 김정명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어느 날 안태섭이 “큰형한테 공갈쳤다”며 이태원 집으로 김정명을 끌고 왔다. 두 사람은 잔디밭 정원에서 한 판 붙겠다고 씩씩거렸다. 대결이 벌어졌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고수들의 대결에선 어느 한 쪽이 넉장거리로 나가 떨어지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엄앵란이 한마디 했다.

 “거참, 잘 싸우네.”

 대결 후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안태섭은 싸울 때 발을 잘 썼고, 김정명은 주먹에 능했다. 나는 의형제로 지내던 권투선수 서강일에게 김정명을 소개했다. 김정명을 권투선수로 키워볼 참이었다. 서강일은 야심 차게 김정명을 조련했다. 3개월 뒤 어느 날, 김정명이 나를 찾아왔다. 얼마나 하드 트레이닝을 받았으면 통통했던 몸이 홀쭉해졌을까. 그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큰형, 너무 힘들어. 난 맞아 죽어도 권투 못해.”

 김정명은 권투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이들을 상대하면서 주먹을 이해하게 됐다. 촬영장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서성거리는 것은 나와 형·아우로 지내고 싶다는 그들만의 표현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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