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보다는 생명 우선 결단 좌익 18명 살려 부하 삼았죠"

미주중앙

입력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어현수씨가 61년전 오늘을 회상하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백종춘 기자

오늘은 6.25 발발 61주년. 6.25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아득한 '역사'가 되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몸으로 겪은 전쟁 세대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의 교훈이 젊은 세대들에게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는 어현수(88)씨에게 6.25는 자신의 결심으로 목숨을 살린 18명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날이다.

북한의 남침 포성이 울린 6월 25일 그러니까 정확하게 61년 전의 오늘 그는 일생 동안 가장 힘든 결정을 해야 했다.

어씨는 6.25 당시 경기도 백천 경찰서 수사주임이었다. 백천 경찰서는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관서로 말이 경찰서지 전투부대나 다름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38선에서 충돌이 일어나 북한과 맞섰던 곳이다.

그는 6.25가 나던 날도 비상소집 사이렌을 듣고 본서로 출동했다.

"전에 없던 포 소리가 들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죠. 아니나 다를까 본서에서 무조건 인천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현 경찰대학의 전신인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한 어씨는 당시 국내 최연소 수사주임이었다. 일반사범들과 공산주의 사상이 의심되는 정치사범들의 수사와 관리가 그의 임무였다. 전쟁이 터지고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서장으로부터 유치장을 '처리'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유치장에는 일반사범들을 비롯한 좌익분자로 분류되는 정치사범 18명이 함께 수용돼 있었다.

"처음에는 '처리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했는데 나중에 처형시키라는 의미라는 걸 알았죠. 유치장에 가보니 잡범들은 이미 풀려났고 정치사범들만 옹기종기 모여있더라구요. 실탄이 든 총을 들고 그들 앞에 섰습니다."

유치장 '처리'를 맡긴 서장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스치며 엄청난 책임감이 몰려왔다. 번민의 시간이 흘렀다. 포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다른 인력들과 가족들을 태운 트럭은 이미 인천으로 떠났다.

'처리하라'는 명령과 함께 지급된 실탄이 눈에 박혔다. '사상'보다는 '생명'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떨고 있는 18명의 손목에 묶인 철선을 끊어 줬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들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더군요. '여러분은 이제 자유'라고 말하자 '고맙습니다'라며 펑펑 눈물을 흘리더군요. 사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줄을 잘못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내가 '처리' 명령을 수행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차마 총을 들지 못했습니다."

어씨의 결단으로 풀려난 사상범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있던 사람들이었지만 풀려난 후 어씨를 따라 남한군에 합류해 함께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렀다. 사상보다 목숨을 구해준 젊은 수사주임의 길을 믿고 따른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88세요. 지금까지 살면서 수없는 판단을 해왔지만, 6·25가 나던 날 27살 젊은 나이에 18명을 살린 결단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전쟁 후 미8군에서 근무하다 국무부 초청으로 1977년 미국으로 이민온 어씨는 환경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10여년 전 퇴직했다.

슬하에 둔 1남3녀가 장성해 손자,손녀가 9명이 생겼다. 6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때 자신을 따라준 18명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맘 때가 되면 그들의 눈동자가 더 또렷하게 생각나요. 살아있으면 80~90 쯤 됐겠지요. 어느 곳에 있든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길 바래요.”

부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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