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④ 조영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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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시절의 조영남. [사진=고서점 호산방 제공]

조영남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도 든다.

 1969년 부산 국도극장 개관 기념 ‘10대 가수쇼’가 열렸다. 68년 ‘딜라일라’로 스타가 된 신인가수 조영남이 나타났다. 톰 존스의 원곡을 번안한 ‘딜라일라’는 변심한 애인이 불 꺼진 창 안에서 딴 남자와 잠자리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는 내용이다. ‘밤 깊은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창문에 비치는 희미한 두 그림자/그댄 내 여인 날 두고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나/오 나의 딜라일라’라는 애절한 가사에 세시봉 세대들은 열광했다. 심지어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부엌칼을 치켜들고 두 남녀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연기하며 노래를 했다.

 조영남은 신인 시절부터 전혀 신인 같지 않았다. 한마디로 버르장머리가 없는 후배였다. 그런 이야기가 내 귀에도 자주 들려 왔다. 특히 나와 절친했던 포클로버스(최희준·박형준·위키 리·유주용) 멤버들은 조영남이라면 이를 갈았다. 포클로버스는 편곡을 못하면 가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실력파였다. 조영남 같은 후배가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빗물이겠지’로 엄청난 인기를 모은 신인 이상열이었다. 둘이 ‘건방진 쌍두마차’였다. 특히 조영남은 대선배들 앞에서도 다리를 꼬고 앉았을 정도였다.

 부산 국도극장 대기실은 여러 가수들로 붐볐다. 그 쇼의 간판으로 초청된 나는 그날따라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아내가 프랑스제 옷감을 구해 지은 옷과 턱시도, 에나멜 신발로 한껏 멋을 냈다. 무대에 설 차례가 되어 단장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형님, 옷 참 좋~습니다.”

 조영남이 소파에 드러누워 발을 꼰 채 나를 올려다보며 던진 말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남동 양부인 집에 가면 커튼 옷감이 다 그런 거던데요.”

 ‘양부인’이라면 술집 여자다. 집사람이 최고 옷감으로 지어준 옷을 그런 데 비유하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조영남을 바닥에 팽개친 후 몸을 밟았다.

 “너 이 자식. 내 앞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러곤 번쩍 들어 출입구로 던져버렸다. 놀란 조영남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무대 인사하고 대기실로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날 걱정했다.

조영남의 출세곡 ‘딜라일라’가 수록된 LP판(1970년). [사진=고서점 호산방 제공]

조영남의 매니저가 명동의 주먹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도망가란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난 겁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태연하게 신발끈을 묶고 있는데 대기실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 한판 뜨자’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영남 매니저가 무릎을 꿇은 채 5m가량을 기어오는 게 아닌가.

 “큰형님, 영남이 무례한 것 사과드립니다.”

 알고 보니 조영남 매니저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던 복서 서강일과 주먹계 족보상으로 동생뻘이었다. 내가 서강일과 의형제 사이라는 걸 알고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조영남 사건은 금방 소문이 났다. 그 일 이후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내 매니저로부터 조영남이 시민회관(구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루 네 차례 리사이틀을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날 모든 스케줄을 빼고 근처 다방에 있다가 네 번의 공연이 끝날 때마다 무대로 올라가 꽃다발을 전했다. 그게 내 마음의 표현 방식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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