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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률 전 국세청장 수사가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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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자 국세청은 안도하는 분위기다. 한 전 청장의 귀국으로 수사가 시작된 지난 2월 이후 국세청 내부에서는 수사의 방향과 폭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검찰이 15일 한 전 청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적용한 혐의는 두 가지. 주정업체 몇 곳으로부터 자문료 6900만원을 받은 부분, 그리고 전군표 전 청장에게 그림 로비를 한 것이다. 자문료를 받는 데 관여한 전직 국세청 간부는 건강이 나빠 불입건 처분됐다. 국세청 내부에선 생각보다 파장이 크지 않았다며 내심 선방했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한 전 청장이 미국에 있으면서 대기업들로부터 받았다는 6억6000만원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회계법인을 통한 자문료의 대가여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게 검찰의 결론이다. 하지만 30∼40쪽의 보고서를 제출한 대가치고는 아무래도 과하다.

 기업들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국세청 고위 간부들이 퇴직 후 자문료 등의 명목으로 회계법인을 통해 기업 돈을 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외이사 시장에서도 국세청 간부들은 공정위 간부들과 함께 기업들의 최우선 영입대상으로 꼽힌다. 지방에 기반을 둔 중소기업들도 그 지역에서 근무기간이 긴 세무 공무원들을 영입하려고 한다. 국세청은 이를 “전문가 영입 차원으로 봐달라”고 말한다.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업 입장에선 ‘세무조사’에 대비한 안전판 역할을 기대하는 게 더 클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세청처럼 내부 정보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는 폐쇄적인 기관도 없다”면서 “전직 국세청 간부들이 내부 정보만 듣고 와도 기업으로선 자문료나 월급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류업체들과 국세청의 유착관계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국세청은 주정업체 면허권과 생산량 결정, 종합 주류 도매업에 대한 면허권 등 주류산업에 대해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다. 물론 “외국보다 주류 관련 규제를 많이 풀었다”는 게 국세청의 말이다. 그러면서도 주정업체들이 전직 간부들에게 자문료를 주는 것에 대해선 ‘관행’이라고 넘어간다. 세무조사와 면허권, 이 막강한 권한을 국민이 왜 쥐여줬는지 국세청이 곰곰이 되돌아봤으면 한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