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경고 … 값은 올랐지만 재고는 넘쳐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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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30여 년 전 세계 은의 절반을 사들였다가 결국 파산한 미국 석유재벌 윌리엄 헌트(왼쪽)·넬슨 헌트 형제.

‘은(銀)의 목요일(Silver Thursday)’. 역사상 최고치에서 은값이 추락하기 시작한 1980년 3월 27일을 말한다. 은 가격은 그날 이후 나흘 새 온스(31.1g)당 40달러 선에서 15달러까지 곤두박질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야망도 무너졌다. 넬슨 헌트(85)와 윌리엄 헌트(82)다.

 헌트 형제는 ‘금융판 이카루스’였다. 두 사람은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돌진한 것처럼 무모한 야망을 품었다. 세계 은 시장의 장악이었다. 실탄은 미국 텍사스 석유재벌인 아버지가 물려준 자금이었다. 몇몇 아랍 부호들의 자금도 더해졌다.

 헌트 형제는 금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79년 은을 매집(cornering)하기 시작했다. 은이 금보다 싸 적은 돈으로 시세를 조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사들인 은을 담보로 맡기고 증권사 등에서 돈(마진론)을 빌려 다시 은을 사들였다. 값이 오를수록 은의 담보가치가 커져 더 많은 돈을 빌려 더 많이 사들일 수 있었다. 대신 은값이 떨어지면 곧바로 ‘분노의 역류(파산)’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헌트 형제가 사들인 은은 무려 5600여t에 달했다. 80년 한 해 세계 공급량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들의 매집에 은값은 온스당 48.7달러까지 치솟았다. 50달러를 조만간 넘을 듯했다. 하지만 ‘검은 백조(돌발사건)’가 출현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가 은의 담보 비율을 낮춰 버렸다. 헌트 형제의 자금 동원에 족쇄가 채워진 셈이었다.



은값은 곧두박질했다. 헌트 형제는 10억 달러 이상을 잃었다. 시세조종 혐의가 인정돼 1억 달러가 넘는 벌금도 물어야 했다. 형 넬슨은 “은이란 ‘악마의 쇠붙이(Devil’s Metal)’에 내 눈이 멀었다”고 자탄했다.

 11일(한국시간) 은값은 다시 하늘을 찌를 기세다. 온스당 41.9달러다. 은값은 최근 1주일 사이에 7.6%나 뛰었다. 이런 속도면 헌트 형제의 매집 시절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 48.7달러를 곧 넘어설 듯하다. 은값은 올 들어서만 34.1%나 솟구쳤다. 이집트·리비아 민주화 시위 등으로 초강세를 보이는 국제 원유 가격 상승률보다 높다. 두바이 원유값은 올 초 이후 27.95% 올랐다. 금값 상승률은 3.81%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은 상장지수펀드(silver ETF)를 ‘21세기 헌트 형제’로 꼽았다. 주요 시장의 은 가격에 따라 상장된 펀드 값이 변하도록 설계된 투자장치다. 투자자가 뉴욕·런던 등의 증권거래소에서 이 펀드를 사면 은에 투자하는 셈이 된다. 보관과 운송에 적잖은 비용이 드는 은 덩이를 직접 사고 팔 필요가 없다.

 미 월가의 대표적인 은 ETF는 아이셰어스실버트러스트다. 이 펀드가 이달 8일 현재 보유한 은은 1만1242t에 이른다. 헌트 형제가 30여 년 전에 사들여 보유한 5600여t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매집 규모만 놓고 보면 아이셰어스가 헌트보다 훨씬 강력한 시세조종 세력인 셈이다.

 은 ETF의 힘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투자금이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아이셰어스의 자산 규모는 30% 정도 늘었다. 달러 등 통화 가치가 불안해지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자 안전한 도피처를 찾으려는 자금이 증가해서다. 특히 “금값은 너무 올라 사두려면 목돈이 필요하지만 은은 적은 돈으로 투자할 수 있어 개인 투자자들이 좋아한다”고 FT는 최근 보도했다. 개미 투자자들에겐 은이 꿩 대신 닭인 셈이다.

 그러나 미래는 꼭 장밋빛이 아니다. 최근 은 시장엔 경계경보가 울렸다. 은값이 급등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나 실제 수요량보다 많은 은 재고가 쌓여 가고 있다. WSJ에 따르면 이달 8일 현재 재고량은 3만1000t 이상이다. 세계가 공업용·장식용 등으로 1년간 소모하는 양보다 많다. 헌트 형제의 몰락 직전 종교 시설과 각 가정에서 은 쟁반과 수저가 쏟아져 나와 실수요보다 많은 은이 시중에 나돌던 모습과 비슷하다.

 영국 로열뱅크오프스코틀랜드(RBS)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자금이 은 ETF에 몰려드는 추세를 보면 은값이 역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50달러를 넘어설 수 있을 듯하다”며 “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먼저 재미를 본 세력들이 이익을 현금화하기 위해 은을 팔기 시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넬슨 헌트처럼 ‘악마의 쇠붙이’에 현혹됐다고 자탄하는 투자자들이 속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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