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일시귀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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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가 둔황에 도착하였을 때가 1908년 2월 12일이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둔황의 왕(王圓菉)도사를 감동시켜 3주간의 빌미를 얻어 막고굴 장경동에 남아 있는 문헌을 볼 수 있었다. 수개월 전 영국인 오렐 슈타인이 만 건 이상의 고문서를 싹쓸이 해 가 둔황에는 더 이상 고서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어를 해득 못한 슈타인이 펠리오에게 고마운 것은 가치 있는 문헌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동양학에 관심이 많았던 펠리오는 20대 초 프랑스 지배하의 하노이 극동학원의 도서관 사서였다. 1900년 도서관용 서적을 구입하기 위하여 베이징 출장 중 펠리오는 의화단에 의해 프랑스 공사관에 갇혀 있다가 미국 등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풀려 나기도 하였다.

펠리오는 엄선한 2000여 점의 고문서를 왕 도사로부터 당시 80파운드(500냥)에 구입하였다. 그 문서 중 두루마리 하나가 펠리오가 찾고 있었던 혜초(慧超)가 쓴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었다. 이 필사본은 앞뒤가 떨어져 나가 책명도 저자도 알 수 없었지만 펠리오는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라는 불교경전의 해석서에 인용된 “왕오천축국전”이 그가 찾아 낸 황마지(黃麻紙)두루마리라는 것을 알아 내었다.

4년간의 5개 지역의 인도와 페르시아 동부 중앙아시아 여행을 기록한 신라스님 혜초의 여행기는 수 많은 필사본을 통해 당시 인도에 관심이 많았던 唐의 많은 스님들에 의해 널리 읽혀 졌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둔황 막고굴 제17동 즉 장경동에 감추어져 있다가 왕 도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고 펠리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혜초 자신은 스승의 유업인 불경 한역사업에 매진하다가 중국 오대산에서 입적하여 조국에 영원히 돌아 가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은 1283년만에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리고 둔황에서 파리로 옮겨진 후 103년만의 외출인 것이다. 서울 용산의 국립박물관에서 100일간의 전시를 끝내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전시기간중 이명박 대통령등 수많은 내객을 맞아 “위대한 스님, 위대한 문명탐험가” “구도를 향한 혜초스님의 열정” 등 찬사를 이끌어 내었고 많은 한국사람들은 100년을 기다려 혜초와 100일간의 “꿈같은 만남”을 아쉬워하였다.

언젠가 왕오천축국전의 영주 귀국이 이루어 지고 혜초의 여행기가 더 많은 외국어로도 번역되어 읽혀 진다면 8세기 초 한국인 혜초의 문명 탐험정신이 우리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알려질 수 있을 것이다.

“무릇 길이란 멀다고 못가는 법이 없고, 사람에게는 이국(異國)이 따로 없다“
당(唐)에서 활약한 신라인 최치원이 한 말이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글로벌 코리아”의 정신은 이렇게 역사가 오래되었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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