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 수혈, 역학 → 피부의학 … 번역 오류 207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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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송기호 변호사

‘검투사’ 김종훈은 없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4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를 숙이게 한 건 번역 오류였다. 모두 207건이었다.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글본에서 발견된 것만 그렇다. 208쪽짜리 서비스 양허표에서만 111건의 오류가 발견됐다. 87쪽짜리 ‘품목별 원산지 규정’에선 64건이 나왔다. 세 쪽에 두 건꼴로 실수가 나온 것이다. 가장 많은 유형의 오류는 오역(128건)이었다. ‘이식(transplant)’을 ‘수혈(transfusion)’로, ‘역학(epidemiological)’을 ‘피부의학(dermatological)’으로 번역한 식이었다. 공작기계를 ‘공자기계’로 썼다든지, 광택제를 ‘고아택재’로 기재하는 등의 오타도 16건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경제개발협력기구’로 번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꼬리를 물었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4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한·EU 자유무역협정(FTA) 한글본 번역 오류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훈 본부장은 “직원들 업무가 너무 과중했던 것, 예산이 부족해 외부 전문기관 검증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 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그는 “일본 지진과 중동 정치 여건 변화 등으로 우리 기업의 수출 환경이 좋지 않다”며 “4월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이 처리돼 한-EU FTA가 7월에 발효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외교통상부는 EU 측과 외교 공한을 교환해 오류를 정정했다. 새 협정문은 5일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번역 오류를 처음으로 지적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송기호 변호사에게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적해 준 것에 대해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월 말 처음 문제가 제기됐는데 지난달 10일에야 재검독을 시작한 것과 관련해선 “초기 대응을 잘못한 것 같다”고 인정했다.

 외교통상부는 이번 번역 오류 사태와 관련해 감사를 진행 중이다. 김 본부장은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른 문책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최종적으로 제가 교섭본부 조직을 지휘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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