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폴리 대혈투] “북한 용병 투입 소문 돌아 섬뜩 … 항구의 현대·기아차 모두 강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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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코리아 용병’ 소문이 퍼졌다는 얘길 들었을 때가 가장 두려웠다.”

 리비아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 교민들이 내전 양상으로 치닫는 리비아 현지 상황을 전하며 한 얘기다. 북한 용병들이 내전에 투입됐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남북한 사람과 외모가 구별되는 것도 아니어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시민군이 장악한 리비아 동부 지역 데르나 건설현장에 머물다가 이집트로 탈출한 원 건설 직원들은 25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반정부 시위대 중 시민자경단이 밤이 되면 약탈을 일삼는 폭도로 변한다”며 현지의 위험한 분위기를 전했다. 이들은 “21일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보낸 용병 40명이 데르나 인근에서 반정부군에 의해 대부분 사살당하는 일도 있었다”며 “데르나 인근 항만을 통해 수입된 현대·기아차도 모두 약탈당했다”고 밝혔다. 리비아 사태가 반정부 시위를 넘어 내전 수준의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의미다. 리비아 데르나에서 주택 건설 사업을 하고 있던 원 건설 직원들은 동남아시아 근로자 1430명을 포함, 1500명에 달한다.

이들은 교도소에서 탈옥한 죄수들과 폭도들이 현장에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인근 학교와 예식장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탈출을 감행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약 350㎞의 사막 길을 뚫고 탈출하기까지 대형 트레일러 18대와 밴 2대가 동원됐다.

 원 건설의 한 직원은 “편의상 여권을 약 1100㎞ 떨어진 미수라타에 맡겨뒀는데, 여권을 가져오면 1년치 연봉보다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는데도 제3국 근로자 중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어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시민군이 장악해 비교적 탈출이 용이한 동부지역에 비해 교전이 진행되고 있는 서부지역에 머물고 있는 교민들 일부는 여전히 탈출에 실패한 채 고립돼 있다. 리비아 서부 날루트 부근 건설공사 현장에 갇혀 있는 최인호(29)씨는 트위터를 통해 “(한국 정부의) 전세기의 목적지는 이집트라서 서부지역 교민들은 육로를 통해 튀니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며 고립된 서부지역의 상황을 전했다. 최씨는 “150㎞가량 떨어진 한국인 건설현장에는 50명 미만의 한국인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전날 현지인들이 습격해 고가의 장비와 차량 등을 강탈했다고 전해들었다”며 “보름치 기름과 식량으로 버티 지만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리비아 내 북한 용병이 있다는 소문에 대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한 외교 관계자는 “과거 북한군이 리비아에 파견된 전력이 있어 그런 소문이 떠돈 것으로 본다”며 “19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 인터넷판에 한국 용병에 관한 글이 올라와 이런 소문이 난 것으로 보인다. 주영 한국대사관을 통해 항의해 현재 해당 기사와 오디오 파일은 삭제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서승욱·남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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