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5) ‘우직하게 룰 지킨 선수’ 를 기억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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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1968년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에서 로베르토 드 비센조(아르헨티나·사진)는 66타를 쳤다. 연장전을 준비하던 그를 경기위원회가 불렀다. 스코어카드에 그가 버디를 한 17번 홀(파4)에 3이 아니라 4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커인 토미 에런이 4로 잘못 적었고 연장전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드 비센조는 총 타수만 확인한 후 그냥 사인을 했다. 총 타수는 66으로 맞았다. 그러나 17번 홀의 스코어가 3이 아니라 4라면 그의 타수 합계는 67이 된다.

골프 규칙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깐깐하다. 한 타라도 적게 적어 사인을 하면 무조건 실격이다. 드 비센조처럼 친 것보다 더 많이 적어내면 실격은 시키지 않는 대신 적어낸 숫자를 실제 친 것으로 계산한다. 드 비센조는 총 타수가 67타수로 변경되어 연장전에 가지 못했다. “덧셈 시험도 아닌데 이게 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날은 드 비센조의 생일이었다.

골프에선 완고한 규칙 때문에 황당한 일이 더러 일어난다. 최근 파드리그 해링턴은 1㎜ 정도 공이 움직인 것을 모르고 벌타가 부과되지 않은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해 실격됐다. 2007년 마크 윌슨은 오지랖 넓은 캐디 때문에 벌타를 받았다. 동반 경기자가 자신의 캐디에게 “윌슨이 어떤 클럽을 쓴 거 같냐”고 물었는데 윌슨의 캐디가 끼어들어 “18도 하이브리드를 썼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캐디가 실수를 하면 선수가 뒤집어써야 한다. 폭우 때문에 퍼팅 할 때 우산을 씌워준 캐디, 규정보다 많은 클럽을 넣어 온 캐디, 그린에서 수건으로 벌레를 쫓은 캐디 때문에 벌타나 실격당한 선수도 있다.

골프 규칙은 착한 사마리아인에게도 냉혹하다. 동반 경기자가 그린에서 깃대를 맞혀 2벌타를 받을 것 같아 깃대를 뽑아준 선수가 벌타를 받은 일이 있다. 상대의 스윙 템포가 너무 빠른 것 같다고 조언을 해준 선수도 벌타를 받았다. 수건을 깔고 스윙하다 실격된 선수, 벙커샷을 실수한 다음 화가 나서 클럽으로 모래를 때려 벌타를 받은 선수 등 황당한 일은 종종 일어난다. 골프 규칙은 법조문보다 어렵다는 푸념도 나온다.

그래서 규칙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다. 빠른 현대사회에 맞게 융통성 있게, 일반인도 쉽게 이해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TV 카메라에 많이 잡히는 스타 선수만 시청자의 제보에 걸려 실격되는 불공평함도 없애야 하며, 모르고 한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특히 힘을 얻고 있다.

반대 의견도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골프는 심판 없이 본인이 사인한 스코어카드를 믿어야 하는 양심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스코어카드 오기는 절대 용납되어선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골프로 큰돈을 버는 스타 선수들은 당연히 룰에 해박해야 하며 규칙도 제대로 모르고 공만 잘 치는 스윙 머신이 최고 선수가 되면 골프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기자에게 골프 룰 개정에 관한 투표권이 있다면 바꾸지 말자는 쪽에 찍겠다.

실용과 합리성에 따라 모든 것이 그때 그때 움직이는 빠른 변화의 시대에 골프 같은 우직한 스포츠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작은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전통과 명예를 지키는 골프의 매력이라고 본다.

복잡하고 고루하며 때론 가혹한 골프 룰은 다른 스포츠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다. 합리적인 룰을 가진 스포츠에서는 드 비센조 같은 억울한 선수는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드 비센조는 아직도 골퍼들에게 기억된다. 반면 68년 마스터스 우승자 밥 골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드 비센조는 “마음이 아프지만 골프의 규칙은 지켜야 한다”고 말해 보비 존스 상을 받았다. 그는 골퍼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이야기를 남겼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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