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북한군 33명 사살 ‘북파 공작’ 공개한 이진삼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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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67년 9월의 어느 날 밤. 만 30세의 육군 대위 이진삼(사진)은 북한군 복장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휴전선을 넘어 황해도 개풍군으로 침투했다. 북한 무장공비 출신인 스무 살 남짓의 대원 4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대위는 이후 67년 10월까지 두 차례 더 북한으로 넘어가 모두 33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 군에선 이를 ‘응징보복 작전’으로 명명하고 수년 전까지 군사 기밀로 취급했다. 당시의 작전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건 지난달 24일 국회 국방위원회와 김관진 국방장관 간의 간담회를 통해서다. 작전의 주인공인 이 대위는 지금 자유선진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74세가 된 이 의원은 7일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하다 ‘국방을 지키는 우리 국군에게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지 않느냐’는 거듭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육사 15기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 의원은 “군에 있는 후배들이 독한 맘을 먹어야 적이 도발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적을 알면 두렵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북한이 함부로 대들지 못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고 싶다”며 “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배들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고 기강을 바로 세우면 좋겠다”고 했다.

1967년 육군 방첩부대에서 대위로 근무할 때의 이진삼 의원. 태권도 7단인 이 의원은 무장공비 출신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킨 뒤 북한으로 침투해 북한군 33명을 사살했다. [이진삼 의원실 제공]

-북한에 침투한 배경은.

 “66, 67년 북한의 도발이 극에 달했다. 66년 57회, 67년 118회에 걸쳐 무장공비가 침투했거나 국지 도발을 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방첩부대에 있던 내가 방첩대장이던 윤필용(작고) 장군에게 ‘북한으로 보내 달라. 북한군 사단장의 목을 따오겠다’고 요청했다. 윤 장군은 ‘살아 온다는 보장이 없다’며 만류했지만 나는 꼭 가서 응징하겠다고 했다.”

-무장공비 출신 과 갔는데 믿을 수 있었나.

 “남한에서 잡힌 무장공비 중 4명을 선발했다. 단검 훈련 등을 혹독하게 시키고, 불고기도 사주면서 신뢰를 쌓았다. 첫 번째 작전 때는 ‘대원들이 변절하면 나는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도 한 게 사실이지만 1차 침투 이후 그들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

-침투 과정은.

 “지뢰가 없는 계곡을 타고 적진으로 다가갔다. 적의 복장을 했지만 조마조마했다. 계곡 1㎞를 전진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침투에 성공해 무기를 든 적군들을 사살했다. 그러나 사단장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가족들은 작전을 알았나.

 “최근까지도 몰랐다. 작전을 앞두고 잠자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은 아빠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3성 장군 출신 동기들도 이제야 당시 작전을 알게 됐다며 격려 전화를 줬다.”

 이 의원은 “북한은 이후에도 김신조를 남파하는 등 도발을 계속했고, 나는 무장공비를 사살하고 땅굴을 찾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이 의원은 최근의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언급하면서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우리 군의 모습에 너무 화가 났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린 군의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요새화된 북한은 항상 도발할 준비가 돼 있는데 우리 군의 기강은 해이해진 것 같다. 이걸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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