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독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동서고금을 떠나 독설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인 모양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학자·사상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위정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독설로 유세(遊說)했다고 한다. 당시에 편찬된 『여씨춘추』에 보이는 각주구검(刻舟求劍) 고사가 그런 예다. 배로 강을 건너던 칼잡이가 칼을 물에 빠뜨리자 뱃전에 표시를 하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라고 해 웃음거리가 됐다는 얘기다.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란 뜻이 숨어 있다. “지나간 옛 법만 갖고 다스리면 나라 말아먹기 십상”이라고 위정자들을 경계한 거다. 독설에도 격(格)이 있었던 셈이다.

 현대 정치에서 독설은 비방과 비난뿐이기 일쑤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밥 도넌 하원의원이 퍼부은 독설은 매우 원색적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여자들의 체취가 밴 조깅 반바지와 허연 넓적다리로 백악관의 품위를 손상시킨 오입쟁이’라니. 클린턴의 대응도 피장파장이다. “그 사람(도넌)을 볼 때마다 광견병 약이 왜 필요한지 알 것만 같다”고 했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따로 없다.

 독설은 마음을 베는 칼이다. 그래서 독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다가도 뉘우치기는커녕 증오심만 생기게 한다. 독설이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기도 전에 거부감을 주는 이유다. 그런데도 자신의 주장을 차분한 언어가 아닌 독설을 동원해 표현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은 세상이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엊그제 미국에서 발생한 개브리얼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 피격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치권의 독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후퇴하지 말고 (총을) 재장전하라” “M16 자동소총으로 (기퍼즈를) 쏘라” 같은 극단적 정치 언어가 사건의 한 원인이라는 인식에서다. 독설이 분노를 증폭시키므로 정치적 표현을 순화해야 한다는 게 자성론의 핵심이란다.

 우리 정치권에도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닐 듯싶다. “이 정권을 확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악의 무리, 탐욕의 무리를 반드시 소탕하자”는 독설이 나돈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생존해 있는 전 대통령을 ‘치매 노인’이라고 함부로 표현하는 게 우리 정치인 수준이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정치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깡패들에게나 알맞은 직업”이라고 했다. 언행을 삼가고 삼갈 일이다. ‘그 말 지금에도 딱 들어맞는다’는 비아냥 안 들으려면.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