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럽지 않은 삶의 함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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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호 18면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남부럽지 않게’나 ‘남처럼’이란 말은 일종의 덫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이웃집 잔디가 더 좋아 보이게 마련이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끝없이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 대한 질투와 선망뿐 아니라, 대세에 속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본인이 못나 보이지 않나 하는 두려움도 깊다. 그래서 정작 원하는 삶은 따로 있는데 남을 의식하면서 억지로 가짜 삶을 살다 보면 오히려 하루하루가 버겁고 무거워진다. 심리 분석을 하면서 ‘남처럼’이란 허상을 버리고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도록 도와주려 해도 거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남들에게 뒤처지면 어떡하느냐, 남들에게 무시당하면 어쩔 것이냐 등 ‘남들처럼’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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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엉뚱한 고집을 부리다가 가난해지거나 출세를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주관과 철학에 따른 선택이라면 부끄러울 것도 꿀릴 것도 없다. 사실 남 따라간다고 안락한 삶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주식투자, 부동산, 자격증, 유학 열풍 등 선발주자가 좋은 몫은 다 빼먹은 후 들어가면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학자나 예술가들은 대세를 좇아가다 보면 스스로 이류가 될 뿐 아니라, 쪽박을 차기도 한다. 누군가를 모방하다 보면 싸구려 키치 이상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창조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를 앞서는 지혜도 없으니 과감하게 다른 길을 택하지 못한다. 주류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다는 얘기다. 때론 남다른 인생을 사는 특별한 사람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들을 평가절하하면서 안심하는 이들도 있다. 독특한 삶의 가치를 깎아내려야 상투적 일상을 사는 자신이 덜 한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나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을 갔을 때 위대한 시를 남겼다. 사마천의 사기나 공자의 논어도 그들이 관직에 머물렀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작가인 헨리 소로나 에드거 앨런 포는 실용주의적인 미국 문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다. 고갱·고흐·이중섭·박수근 같은 화가들도 살아 있을 때는 그랬다.

공고를 중퇴했지만 군수가 된 정갑철 화천군수에 대한 기사와 학벌·인맥과 상관없이 산 김기덕 감독에 대한 기사를 접하며 비주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창의성 교육’이란 거창한 구호를 걸면서도 정작 남과 다른 목소리를 가진 아이들은 무시당하고 야단맞기 일쑤다. 사회에서도 줄 잘 서는 처세꾼들은 다른 시각의 창조적 목소리를 곧잘 억압한다. 남과는 다른 이들이 황량한 벌판에서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소진시키지 않도록 좋은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성숙한 집단이 할 일이다. 아무쪼록 김 감독이 강원도에 머무는 동안 소동파처럼 하늘을 노니는 신선의 경지를 마음에 품고 잘 놀고 온 후(挾飛仙以遊遊) 다시 왕성한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적극 환영하는 따뜻하고 신나는 나라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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