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스러움과 찬란한 낭만 그리고 겨울의 여백이 있는 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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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호 03면

탈린의 매력은 커다란 언덕 위에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고,그래서 조금만 올라가면 탁 트인 경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탈린은 실타래 같다. 좁은 골목길이 발달한 성곽도시여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아늑해서다. 또 탈린은 장작 같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면 금방이라도 감정에 활활 불이 붙어버릴 것 같아서다.
사람들이 탈린에 가는 건 그 숱한 골목길에 흩어져 있는 불같은 감성을 만나기 위함이다. 잃어버렸거나, 혹은 스스로 제거해 버렸을 수도 있는 감성을 수집하러 그곳엘 간다. 여행자의 발길이 줄어든 겨울이라지만, 주말만 되면 빈 방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여행자들이 넘쳐난다. 유럽에 비해 저렴한 물가, 그럼에도 유럽 어느 나라 못지않은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찬란한 낭만. 이 세 박자를 과감히 뿌리칠 여행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탈린, 작고 따뜻한 다락방같은 도시

탈린은 동화적인 풍모를 자랑하는 곳이나 단맛은 제거되었고, 상당히 시(詩)적인 도시이면서 다락방 같은 곳이다. 특히 밤이 되면 탈린은 도망을 온 사람의 얼굴처럼 나지막해진다. 무슨 애틋한 사연이 있어서 도망을 왔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꼭꼭 숨으려 하는, 그런 도망을 닮아 누구나 간절히 밤을 맞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도시는 살짝 들떠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수예품을 팔고 있는 쉰여섯의 욜린다 아주머니는 지금 막 이웃 가게에서 산 양초 하나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샀다며 자랑이다. 며느리에게 줄 선물인데 내년에는 꼭 손자를 품에 안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건넬 거란다. 아들네가 결혼한 지 꽤 되었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아 내심 섭섭한 모양이다. 그럼 남편에게는 어떤 선물을 준비했느냐고 묻자 세상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친근한 대답이 돌아온다. “남편한테 선물을 왜 해요? 내가 바로 선물이죠.”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돌아오는 길, 몇 번 지날 때마다 문이 굳게 닫혀 있던 건물로 젊은 학생들이 들어서는 게 보여 그 앞을 서성인다. 용기를 내서 한 여학생에게 말을 건다.
“이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궁금했어요. 늘 음악소리를 들었거든요. 어떤 날은 피아노 소리였다가, 어떤 날은 바이올린 소리였다가…. 혹시 여기는 음악학교인가요?”
“네. 그 비슷한 곳이에요. 여러 사람이 와서 음악을 공부하거나 저희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좋아하는 걸 연습하고 그래요.”
“뭘 연습하는데요?”
“합창요. 우린 성가를 연습해요.”

약 마흔 명으로 구성된 이 합창단의 이름은 ‘휙!(Huick!)’. 많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에스토니아 말이란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큰 성가대회가 열리는데 탈린은 물론 서너 시간 떨어진 지방에 사는 대학생들까지 모여 연습을 한다. 지휘를 맡고 있는 안나에게 “이번 대회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다른 달도 아닌 이 12월에 이렇게 모여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고마운 일 아니냐”고 말한다.

화가인 알렉산드르 사브첸코프(50)를 만난 일은 조금 농담 같다. 도미니크수도원의 기도실이라고 알려진 지하방을 찾았을 때 놀란 것은 동굴 같은 공간에 가득 채워진 그림들 때문이었고, 또 한 번 놀란 것은 그 그림들은 그림의 숫자만큼이나 각자 다른 화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그림들 모두가 사브첸코프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놀란다. 그곳은 더 이상 기도실이 아니라 그저 한 예술가의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찾아왔고 그 시간이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영적인 보살핌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왠지 그런 느낌들을 문득문득 받고 있을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그는 대답을 살짝 비껴 이렇게 말한다.
“신은 항상 보고 있어요. 그리고 노력하는 이에게 영감도 주죠. 영감이란 건 무의식적으로 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주지는 않아요. 메마른 땅에 아무나 데려다 놓았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수확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헤어지는 길에 그가 나뭇가지 하나를 내민다. 정원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가끔 이런 모양의 가지를 떨어뜨린다면서 건넨다. 받고 보니 십자가 모양의 나뭇가지. 그가 기도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수많은 이들이 기도실을 찾느라 그의 작업실 문을 두드리면서 귀찮게 해도 그가 그곳을 등질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가장 신이 잘 보이는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이 분명하므로.
조그마한 선물가게의 문을 연다. 무엇이 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을 참견하고 싶어서다. 이것저것 참견을 하다 다시 또 시간을 가진 다음 들르겠다며 문을 나선다. 그리고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나는 탈린에 사는 당신이 부럽다고. 당신은 말한다. 눈 내리는 12월의 탈린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서 자신을 부러워하는 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고.

탈린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그녀에게 대뜸 묻는다. “그러니까 탈린은 뭐예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녀는 생각하는 듯 물건을 만지작거리더니 대답한다. “탈린은 아주 작고 달콤한 케이크예요.”
탈린이라는 도시의 형태가 동그래서가 아니다. 달콤해서도 아니다. 도시가 가진 아주 특별한 사랑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아주 예쁘게 생긴 케이크가 당신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두근거리겠죠.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곧 참을 수 없게 될 거잖아요.”

처음 탈린에 왔을 때는 잘 몰랐는데 두 번째 오면서 탈린 사람들 모두가 탈린을 아끼고 가꾸고 있다는 진심을 읽었다고 하자, 정말 맞는 말이라고 한다. 탈린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로 인해 탈린만의 색을 잃어가는 것을 탈린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원하는 것과 원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잃고 마는 것의 대비는 어마어마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놓치지 않기 위해 그만큼의 안간힘으로 그들이 오래 지켜온 색깔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그런가. 사이가 드문드문한 가게들, 식당들도, 행간이 선명한 술집의 불빛조차도 모두가 탈린이라는 인생의 골목길을 수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말이면 핀란드·스웨덴 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많이들 온다는 탈린은 어찌 보면 과한 바(Bar)의 숫자만으로도 도시 자체가 흥청망청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깊은 밤, 공원에 모인 탈린 청소년들의 술 마시는 방식을 대하면서 잠시 놀란다. 일단 그들은 도시 가운데 있는 공원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다. 음침한 곳도 아니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는 공간도 아니다. 꽤 여러 명이 서서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가만 보면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음료수 병에 알코올을 담아 마시고 있다. 그들도 세상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완전’ 밝은 데서 하는 젊은 방식의 행동들은 그 행동이 어떠냐와 상관없이 ‘완전’ 귀하게 보인다. 소박하고 당당해서 건강한 낭만이다.

그러고 보니 탈린이라는 도시와 잘 어울리는 키워드는 ‘여백’이다. 몽글몽글한 감성에 흠뻑 젖게 해주면서도 골목길을 걷는 이들 마음 한쪽에 여백을 번지게 한다. 돌길의 냉엄한 틈과 다정한 온도. 나무문짝들의 수런거림. 밤이 되면 촛불인지 가로등인지 분간이 어려운 불빛들의 속닥거림. 그리고 치마폭이 긴 바람. 이 모든 아름다움도 탈린의 여백을 건드리거나 방해하지는 못한다. 아, 세상에 이런 여백이 있구나. 이런 여백을 여기서 만나는구나. 나는 이곳, 탈린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여백의 여정’이라 부르겠다. 우리가 그곳에 우리의 시간을 조금 남겨두고 온다 해도 그것은 쉽게 낡거나 삭지 않을 것이며, 만약 길을 걷다 장갑을 잃고 맨손으로 돌아오더라도 그 얼마나 살아있는 눈빛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만 적게 될 것이다. 탈린에서 돌아간다면 탈린을 닮은 좋은 소식이 도착해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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