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가족’의 ‘소비’를 강요하는 연말연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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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규택의 ‘세모(歲暮) 가두(街頭)의 불경기 풍경-도회부처(都會夫妻)’ (『별건곤』, 1930.12)라는 제목의 만화. 불경기에도 연말연시를 맞이해 소비를 해야 하는 도시 가정의 화려함(아내)과 그 이면(남편)을 풍자한 그림이다.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깃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그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하여 주려 하였다. 사실 4, 5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기쁨을 가져 이렇게 거리로 나온 젊은 부부는 구보에게 좀 다른 의미로서의 부러움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가정을 가졌고,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당연히 그들의 행복을 찾을 게다. 승강기가 내려와 서고, 문이 열리고, 닫혀지고, 그리고 젊은 내외는 수남이나 복동이와 더불어 구보의 시야를 벗어났다. 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1930년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1일’(1934)에서 하루 동안 경성시내의 이곳 저곳을 산책하는 주인공 ‘구보’가 화신백화점에 이르렀을 때의 한 대목이다. 이 장면에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등장한다. 1929년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일본기업에 의해 처음 세워진 뒤, 화신상회와 동아백화점 등 한국인이 만든 백화점들까지 줄지어 개점하면서 1930년대는 백화점이라는 근대적 고급 소비의 공간이 한국에도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초기 백화점은 ‘가족의 행락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백화점 레스토랑은 가족의 외식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었다(김인호, 『백화점의 문화사』, 살림, 2006).

 그리하여 젊은 내외와 아들 하나로 구성된 가족이 그곳에 서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함께 외식을 하는 가정은 그 자체 ‘행복’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층 가족의 소비문화를 보며 가난한 노총각 ‘구보’는 만감이 교차한다. 이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축복해 주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가, 결국은 부러움과 열등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감정의 흐름은 비단 1930년대 소설 속 ‘구보’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연말연시가 되면 ‘행복한 가족’의 표상이 대중문화 속에 넘쳐난다. 그리고 ‘연말연시를 가족과 함께’라는 표어와 대중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가족영화’ ‘가족선물’ 등의 ‘가족주의’ 마케팅이 가족이 없거나 소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적 ‘불행’에 빠뜨린다. 그런데 이미 다섯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한국사회에서,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혼자 ‘나 홀로 집에’나 보는 것이 언제까지 ‘부끄러운’ 일로 여겨져야 할까?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