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4) 승리에 취한 해방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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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24일 금문도에 상륙한 해방군은 3일 만인 26일 오후 5시30분쯤 거의 전사하거나 투항했다. 대만 측에서는 2만 명이 금문도에 상륙했다고 하지만 전투병은 9000명을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뱃사공들이었다. 1만 명 정도 전사하거나 주민들에게 맞아죽고 4000여 명의 포로들은 이틀 후 대만으로 압송했다. 금문도를 떠나기 직전의 해방군 포로들(1949년 10월 28일 금문도). 김명호 제공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패배를 예견했다. 극비리에 최측근들과 머리를 맞댔다. 핵심은 “중공군의 압박을 피하려면 정부를 어디로 이동하느냐”였다. 항일전쟁을 지휘했던 서남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지리학자 장지쥔(張其均)이 대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 “중공은 해군과 공군이 없다. 대만으로 가면 한동안 저들의 추격을 저지할 수 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공업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교통망도 쓸 만하다. 공산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지역이라 저항이 발생해도 진압하기 수월하다.” 지도를 볼 때마다 떠올랐던 대만의 생김새가 고구마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장제스는 300여 대의 전투기와 4개의 해군기지를 통째로 실어 날랐고 중앙군 30여만 명을 대만과 동남 연해의 섬에 배치했다. 그사이 대륙의 국민당 군은 거의 괴멸했다.


1949년 10월 17일 샤먼(廈門)을 점령한 화동야전군 10병단은 금문도 상륙을 서둘렀다. 병단사령관 예페이(葉飛)는 항일전쟁과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청년 전략가였다. “눈앞에 보이는 금문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대만의 교두보다. 저 병풍을 걷어치우지 않으면 우리가 봉쇄당할 날이 온다”며 지휘관들을 독려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교만이라는 고약한 세균이 머리 한구석에 침투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총명하고 냉정한 예페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신중국 선포 3주 후였다.

금문도에는 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국민당 신군(新軍) 2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대만에서 훈련시킨, 향토의식이 유난히 강한 부대였다. 예페이는 이들을 단순한 패잔병 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바다에는 대륙에서 철수한 병력을 실은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부대들이었다. 항일명장 후롄(胡璉)이 지휘하는 18군도 그 안에 있었다. 저장(浙江)성 주산(舟山)반도로 향하던 중 금문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롄은 국민당군이 대패한 화이하이(淮海) 전역(戰役)의 부사령관이었다. 중상으로 입원해 있을 때 “중공 측에는 린뱌오와 천이(陳毅) 등 몇 명 외에는 신통한 지휘관이 없다. 우리가 계속 지기만 하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이나 군의 사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세상 없는 지휘관과 제 아무리 용감한 군인들이라도 정치와 외교가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며 면회 온 장제스를 면전에서 들이 받은 적이 있었다. 장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다”며 웃는 바람에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한 게 8개월 전이었다.

10월 24일 밤, 한 척에 금 한 냥과 아편 한 덩어리를 주고 임대한 목선들이 금문도 상륙부대를 태우고 샤먼을 출발했다. 배 안에는 금방 찍어 낸 인민폐와 승전잔치에 쓸 돼지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은 돼지들이 꿱꿱거릴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싱글벙글했다. 그날 따라 약한 동북풍이 불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었다. 대만이라면 몰라도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쥐방울만 한 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양식도 하루치면 족했다.

배가 금문의 구닝터우(古寧頭)에 도착할 즈음 샤먼의 포대가 금문도를 향해 불을 뿜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간의 수교로 막을 내리는 포격전의 시작이었다.
뱃사공들은 연안에 도착하기도 전 바다에 몸을 던져 상륙부대를 불안케 했다. 해상을 떠돌던 후

롄의 18군이 금문도에 와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민 해방군은 초장부터 움직이는 곳마다 지뢰에 몸이 날라갔고, 부상병들은 주민들 몽둥이에 숨이 끊어졌다. 해군과 공군력의 지원이 따라야 하는 상륙전의 기본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채 3일 만에 죽거나 포로가 됐다.

10월 27일 타이베이에서 대만성 체육대회가 열렸다. 승전소식이 전해지자 갑자기 진기록들이 속출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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