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지도자 크기가 나라 크기다’] ‘웨스트 윙’의 바틀릿 대통령을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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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미국 대통령 바틀릿 역할을 맡아 연기한 배우 마틴 쉰. [중앙포토]

우리는 지난 열흘 동안 나라의 안위나 국민의 목숨을 ‘국력’만으로 지킬 수 없는 현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올해 들어 대한민국의 국력은 모든 분야에서 눈부시게 커졌습니다. 수출 규모가 세계에서 일곱째로 큰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도 개최했습니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미국과도 마지막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밴쿠버·남아공·광저우에서는 ‘애국가’와 ‘태극기’가 어느 때보다 많이 울렸고 많이 휘날렸습니다. 말 그대로 ‘더 큰 대한민국’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경제 강국·외교 강국·군사 강국·스포츠 강국을 자랑하면 뭐 합니까? 국력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북한에 번번이 국토를 유린당하고 국민이 목숨을 잃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유약함! 바로 그것이지요. 지도자들과 국민들 모두를 휘감고 도는 유약함 말입니다. 잃을 게 많으니 두렵고, 배부르니 안일해진 것이지요.

 국민들은 이번에 대한민국 최고 지휘부의 ‘위기관리’ 수준에 꽤나 놀랐을 겁니다. 교전부터 사후대응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은 한마디로 ‘허둥지둥’ ‘속수무책’ ‘갈팡질팡’이 어울리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 군의 모습을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한국군이 뜻밖에 약하다’고 조롱조로 보도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이 조롱당한 셈이지요.

 정말 문제는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과 최고 전략 지휘부인 청와대입니다. 국민들은 유약해도 되지만 대통령은 유약할 자유가 없는 자리입니다. 대통령은 두렵고 외로워도 ‘담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용기는 ‘잘 조절된 분노’입니다. 대통령이 분노에 휩싸여 감정적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돕기 위해 참모들이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국방·외교·경제·정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장관·수석비서관·특보·국정원장들은 그런 판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결단’은 참모들의 ‘판단’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결단력이 없는 대통령’과 ‘판단력이 없는 참모’의 만남은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피해를 가져옵니다. 대통령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정보를 취합·분석·판단하는 일은 전문가들이 맡아야 합니다. 대통령과 참모들은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함이 있어야 합니다.

 ‘웨스트 윙’이라는 미국 정치 드라마가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나오는 바틀릿도 비슷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는 주지사 출신으로 군 경험이 없는 대통령입니다. 그는 군 지휘부가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지하벙커로 내려가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의 주치의 중 한 사람인 젊은 장교가 중동으로 출장 가던 중 비행기가 피격당합니다. 합참의장은 모든 정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대응(proportional response)’을 대통령에게 내놓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합니다. 이런 도발을 당했는데 겨우 ‘뻔한 군기지’ 몇 개 폭격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냐는 것이지요. 그는 더 ‘강력한 보복’ 계획을 만들어 오라고 명령하고는 상황실을 나갑니다. 전략가인 비서실장과 합참의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이 냉정을 잃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죽은 대위가 출발하기 전에 대통령에게 보여줬던 가족 사진과 군 경험이 없는 대통령의 첫 폭격명령이라는 점이 냉정을 잃게 만든 것이지요. 상황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합참의장은 강력한 보복 계획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좀 차분해진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적절한 대응’에 대해 설명을 요구합니다. 결국 대통령은 최고 군사전문가들인 참모들의 판단을 따르게 되지요. 훗날 재선에 성공한 그는 참모들의 군사계획을 승인하지 않고 야구장으로 시구하러 떠나자 비서실장이 야구장까지 쫓아가 크게 언쟁을 합니다. 그때 대통령은 “내가 언제 당신들 계획을 거부한 적이 있느냐, 그러나 역사의 평가를 받는 건 나 아니냐”고 소리 지르지요. 결국 최종 결단은 역사의 책임을 지는 대통령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과 참모들이 내린 결정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긴박한 상황에서 냉정하고 정확한 조언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과,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를 걸고 ‘담대한 결단’을 내릴 용기가 있는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솔직한 고백입니다.

정치 컨설팅 ‘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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