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난에 빠진 현대건설 주주협의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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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현대건설 매각 작업이 큰 고비를 맞고 있다. 29일까지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해야 하지만 현대건설 주주협의회와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그룹은 대출 증빙자료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현대그룹이 프랑스의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조달한 1조2000억원에 대한 것이다. 주주협의회는 지난 25일 보도자료를 내고 “28일까지 자금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자료제출을 거부하고 “일정에 따라 MOU 체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주협의회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현대그룹이 끝내 대출계약서 등 증빙자료를 내지 않는다면 현대건설 매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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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빙 제출하면=현대그룹이 1조2000억원에 대한 증빙자료를 내고, 문제 없는 돈이라고 결론이 나면 주주협의회와 현대그룹이 MOU를 체결하면서 매각 일정이 계속된다.

 물론 현대그룹이 증빙자료를 낸다고 해도 문제가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건설의 2대주주인 정책금융공사 유재한 사장은 지난 24일 국회 정무위에 출석해 “매각 규정상 1조2000억원은 입찰일(15일)로부터 최대 5일간 계좌에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 계좌에 자금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계좌에 돈이 없거나 다른 조건이 붙어 있는 대출이라면 새로운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증빙 제출 안 하면=현대그룹이 끝까지 증빙자료를 내지 않으면 주주협의회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1조2000억원 문제가 처음에 불거졌을 때만 해도 주주협의회는 “빌린 돈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며 “본계약 단계에서 대금을 대지 못하면 현대그룹은 우선협상대상자의 지위를 잃는다”고 말했다. 그러다 1조2000억원에 대한 의혹이 확대되자 자금출처를 확인하겠다는 입장으로 바꿨다.

 물론 현대그룹이 자료를 내지 않는 경우에도 MOU 체결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대로 MOU를 체결하는 것도 주주협의회엔 큰 부담이다. 자료를 내라는 요구를 아무 명분 없이 접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현대그룹의 자금조달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거나, 나중에 증빙자료를 내는 조건으로 주주협의회가 MOU 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MOU 체결 미루면=또 다른 시나리오는 주주협의회가 현대그룹이 증빙서류를 낼 때까지 MOU 체결을 미루겠다고 하는 경우다. 물론 현대그룹이 강하게 반발하겠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양측이 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현대그룹이 법적 대응으로 나설 공산이 크다.

 ◆현대그룹 배제하면=주주협의회가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는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가 된다. 하지만 자금출처에 대한 증빙자료를 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우선협상대상자의 지위를 박탈하기는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현대그룹도 소송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주주협의회가 아예 매각 중단이나 보류를 선언할 수도 있지만, 이는 매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주주협의회 책임론=현대건설 매각이 삐걱거리자 주주협의회의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먼저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치열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이 치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투명하고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입찰 다음 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무리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심사과정에선 현대그룹이 낸 나티시스은행 예금 1조2000억원의 성격을 놓고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자금’으로 인정됐다.

 또 입찰을 나흘 앞두고 정책금융공사가 “비가격 요소에 대한 평가를 강화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경쟁만 격화시켰다는 평가다. 비가격 요소에서 불리한 현대그룹이 더 높은 가격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의 처리 과정도 문제다. 매각 협상을 해 본 M&A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전에 정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우선협상대상자에게 자금출처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계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자금조달 방법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MOU 체결 등 정한 절차는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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